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고후 4:16)
요즘 청년들 라이드를 자주 하다보니까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예전 그 시절의 저나 지금의 젊은 청년들이나 고민은 비슷하고, 관심도 비슷하니 살아가는 삶이라는게 특별하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특별한걸 기대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도 안 살아본 시간에 대한 기대가 이 특별함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에 삶에 대한 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이야기의 말미에 마치 네 시간을 나는 지나왔으니 나는 잘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길때가 있는데 어디까지나 내 시간이지 그들의 시간이 아님을 꼭 명심하려고 노력합니다.
교회로 오는길에 특정한 정보를 아마 그 길을 지날때마다 이야기했나봅니다. 맛있는 베이글 집, 커피숍 등등, 이야기를 듣던 청년 하나가, 어~! 이건 재방송인가요? 아마 저들과 저의 큰 차이는 했던말 또 하고, 했던말 또하는 흔히 예전에 제가 경험한 어떤 어른을 통해 경험한 무한반복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혼잣말로, 했던말을 또 하는 시간이 내게도 왔구나! 하는 생각에 내뱉지 말아야할 말을 던졌습니다. “너희들도 좀있음 이렇게 된다..” 우스게 소리라고 던진게 완전 꼰대의 진상처럼 비춰졌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가 쭈빗 올랐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교회는 만만치 않은 환경과 교회안에 대적자들로 늘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바울을 교회와 관계를 끊어내려고 공격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교회는 늘 평온하지 못하고 갈등에 휩싸였던것 같습니다. 이런 정황에 바울은 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 한방이 필요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고린도교회를 든든히 흔들리지 않게하는 것, 그것은 고난을 낙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고난이 어찌 영광으로 느껴질까? 바울이 여기서 특별하게 나누는 것이 육신은 고난가운데 있지만, 영혼이 영광가운데 있다는 매우 어렵고 신학적인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실 신학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골린도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헬라철학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영혼만 깨끗하면 되니까, 육신은 함부로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방탕한 삶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본이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한 그들에게 바울은 역으로 육신이 고난을 받는 것이지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러내야한다는 고난에 대한 생각의 전환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특별함이 느껴집니다.
청년들를 라이드하면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게되니, 제법 친해지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스쳐가듯 만나는 이야기는 겉돌지만, 깊은 속내와 드러나는 마음에 동감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지니 친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걸 공감의 경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책망하거나 다그치는 방법보다 그들과 공감하며 고난을 어떻게 함께 이겨낼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공감할 수 있으면 함께 동행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누다보면, 서로 더 깊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것 같습니다.
묵상
요즘 누구와 공감을 나누고 계세요?
중보기도
교회학교, 중고등부,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열린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부흥은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고, 성장은 어른이 되는 것처럼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2022년 남은 10월11일,12월을 위해서 성도들이 평온한 시간을 보냄으로 2023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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