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지역에 큰 기근이 일어나면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헌금을 모아서 바울 편에 보낸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 교회들의 수고에 감사함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평소에 연보를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런 노력이 교회를 넘어 다른 지역에 있는 형제자매를 돕기 위해 사용되어졌다는 것에 고무적이었던것 같습니다. 당시에 자신의 공동체를 넘어 멀리있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그리스도 공동체에 후원을 한다는 것은 판다지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처럼 거기에 누가 있는지, 연락도 용이하지 않았던 시절에 바울의 이야기만 듣고 선뜻 헌금을 모아서 후원을 한다는 것은 큰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헌금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면 신약성경에서는 십일조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물질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지만 직접적인 헌금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바울은 연보에 대한 언급은 자주 합니다. 오늘날로 하면 매년 드리는 약정헌금이 연보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미국교회들은 연보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1년 약정헌금을 교회의 사역계획을 듣고 스스로 약정을 해서 1년에 얼마정도를 헌금하겠다는 서약을 하고는 매월 나눠서 드리기도 하고, 한번에 드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십일조가 오늘날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십일조와 연보를따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우리들이 눈여겨 봐야할 것은 둘중에 어느게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는 노력보다는 이 두 종류의 헌금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십일조는 한국교회전통에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때도 십일조 신앙은 교회를 세워가는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라는 규례가 생긴 이유와 십일조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구약시대에 십일조는 땅을 분배받지 않은 레위인과 과부, 고아, 이방인, 장애인, 고통받는 자, 가난한자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십일조의 의미, 그리고 정신은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개념보다 그 시대에 필요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그러니 연보의 의미와 이와 비슷합니다.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헌금을 드립니다. 하나님께 정성껏 드립니다. 어떤 마음으로 드리냐면, 이시대에 어려움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을 섬기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숫자에 매몰되지 말고 처음에 믿음이 부족할때 온전한 십일조를 낼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커지면 나중에는 십의 일조를 넘어서 십의 이조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헌금에 대한 목적과 이것을 사용하는 교회도 그 목적에 잘 맡게 사용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초대교회와 비슷합니다. 물질적인 무게가 커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헌금을 드리는자나 사용하는 교회는 그 정신에 있어서 똑같아야 합니다. 오늘 바울이 이런 초대교회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헌금의 숫자보다 그 정신에 무게를 두는 이해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묵상
온전한 십일조는 그럼 어떤 의미일까요?
중보기도
열린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질병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월요일, 한주를 하나님과 든든히 동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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