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누가복음 19:10)
삭대오와 예수님의 만남은 공동체를 흔들어댄 파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세리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받는 평가는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자로 반갑지 않은 존재였고, 이를 살갑게 대하는 예수님은 구원의 선포가 결코 저 높은 곳에 자리해야 가능한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이야기 이후에 이어지는 열므나의 비유는 “천국”에 대한 무게감을 던져줍니다.
열므나의 비유는 우리의 일반적 기독교 성정과 다른 특별한 관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열명의 종에게 한므나씩을 맡기고 멀리 갔던 주인이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얼마씩 벌었는지를 물어봅니다.
맡기고 간것이니, 종이 함부로 돈을 불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주의 의도를 파악했던 것인지 당당하게 자신들이 벌어낸 므나를 자랑하며 주인한테 건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비유의 특별한 방향성을 확인합니다. 주인은 맡기고만 멀리 떠났습니다. 그런데 종들은 자신들의 판단으로 그 돈을 불려놓습니다. 그중에 꽁꽁 숨겨둔 한 종이 그 힌므나를 그대로 돌려주자, 주인은 이 종을 나무랍니다.
이 비유의 전개에서 논리적 구멍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분명히 주인이 종에게 므나를 맡기고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주인은 맡긴 므나를 종들이 불려놓은 것을 칭잔하고 주인이 두려워 그대로 돌려내는 종을 나무랍니다. 여기서, 종들이 므나를 불려놓았다는 성공적인 재테크를 보여주지만, 투자나 벌이라는게 늘 흑자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임에도 이를 당연한 결과인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열명의 종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을 맡겼다는 것, 그리고 이중에 아홉종은 수익을 남겨서 주인에게 칭찬을 받고, 한 종은 주인이 두려워 그대로 돌려준것은 나무라는 것이 비유의 포인트입니다.
삭개오를 만나고 오신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으러 왔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속성을 이야기하시고서는 바로 열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신것은, 한므나를 그대로 숨겨놓고 그대로 주인에게 건넨 종의 고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야무진 분이라, 두려워”, 이 두려움의 근저는 율법이 쳐놓은 그늘막에 갇혀있는 기존의 율법주의 질서를 말하는 듯 합니다. 그 그늘막이 결국 천국의 소망을 망칠 수 있음을 비유는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내려진 그늘막을 살펴보고, 그 그늘막을 넘어서는 기쁜소식을 담아두기 위해서는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인의 성정을 살피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질서는 중요하지만, 질서로 옭아메어지는 관성은 우리를 주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잃은 자를 찾으러 왔다”는 능동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노력은 우리를 더 능동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초대합니다.
묵상
가로막힌 그늘막에 허우적 거리거나, 혹은 발견되어지는 것들이 있나요?
중보기도
소망회 어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청년사역, 젊은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오.
2021년을 잘 마무리하고, 2022년의 새로운 삶을 소망하며, 주님과 든든히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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