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장, 9월16일 금요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로마서 14:14)
음식점에서 동료를 기다리다가 오래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땅에서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만큼 동선이 겹치기도 하고, 식당이 괜찮으면 가끔 그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청년들과 함께 국내 성지순례로, 서울을 출발해서 각 기독교유적지를 돌아보고는 남도끝에 보성차밭에 간적이 있습니다. 일본이 오랫동안 차를 제배한다는 계획으로 대규모로 꾸며놓은 차밭은 아름답고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거의 끝 언덕을 올라 전체 전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아는 선배가 비슷한 여정으로 교회 청년들과 함께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닥 친하지 않지만, 애써 반가움을 표시하고는 내려오면서, 세상 좁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것도 확률로 보면 꽤 낮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만남의 우연의 확률만 그런게 아니라, 삶은 이런 비슷한 확률적인 우연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존재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 그 안에서 만만치 않은 우연들, 우리는 이런 것을 경험하며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 이것도 확률적으로 보면 그리 크지 않은 조건속에서 관계는 이루어집니다. 뭐 길게 이야기 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우리들이 한공간에서 예배하고, 알아가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쉽게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안에 함께하는 이들이 세워가는 관계에 거룩함이라는 조건을 하나 걸었습니다. 그만큼 귀하다는 의미를 이 관계속에 새겨놓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이 조건속에 세상을 보는 관점도 특별합니다. 로마교회가 먹는것, 그리고 율법적인 이런저런 조건들때문에 교회안에 갈등이 일어난것 같습니다. 그안에 바울이 던지는 질문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지 이런 저런 양심때문에 그 목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지말아야할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에 몰입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관계를 흐트르는 것이 문제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은 엉뚱한것에 힘을 빼고 산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자체가 한 공동체를 꾸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을 경험하는 것이니 그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의 경이로움을 고백하며 살아도 부족한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구별하며 사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아닐 수 있기때문입니다.
묵상
혹시 엉뚱한것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중보기도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질병가운데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각속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속회모임을 위해, 속장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