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5)
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아담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원죄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는 죄의 속성을 인류전체에 끌고 들어온 인물로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모든 죄의 문제를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용서받게한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사람으로 인해 죄가 시작되었고, 한사람으로 이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면, 죄의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윤리적인 잣대와 죄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부끄러움으로 출발하는 것을 모두 죄라고 인식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이런 윤리적인 부끄러움은 개인의 취향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안에 음주에 대한 이해, 혹은 물질을 다루는 것에 대한 것들은 처음 기독교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허용의 범위는 넓어졌고, 이해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면,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 기독교가 전해졌을때 예배당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운데 천막을 가려내고 가운데에 목회자가 설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회가 있었고, 예배중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교회가 있는 반면에 악기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로 갈라져서 유악파와 무악파로 나뉘어진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구분과 허용은 실제로 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죄에 무게를 둔 그룹은 행위에 많은 제약을 두어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은혜에 무게를 둔 그룹은 본질이 아닌것에 힘을 빼지 말자는데 방향을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것은 이런 비슷한 고민 때문인 듯 합니다. 어디까지 허용하고, 허용하지 말아야할까? 바울은 이런 고민 앞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의로움이 결과는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가득부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앙은 내가 하는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임을 기억해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묵상
어떤 믿음이 자리하고 계신가요?
중보기도
열린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교회학교, 중고등부, 청년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각 속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속장과 속도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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