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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4주, 4월25일 주일설교





사도행전 4:5-12

무슨 권세와 어떤 이름으로?



사도행전 4:5-12/ 무슨 권세와 힘으로?

오늘은 사도행전과 평행본문인 다른 성경 본문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 받은 제자들의 초기 사역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맞춰서 성전에 올라갔다가,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사건이 다시 유대인들을 동요케 한 것 같습니다. 5절에 보니까, 아마 베드로와 요한이 한 일이 소문이 나서 유대 지도자들과 장로들,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유대 지도자들이 모였던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 받은 후에 더 강력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마치 더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된 것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사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다시 모인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질문하기 위해 서 였습니다. 7절에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9절에 보니까 제자들은 이것을 질문이 아닌 심문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자가 걷게 된 것”보다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했는가? 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이 “권세와 이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권세는 어떤 에너지로 세상을 살아가냐는 질문이고, 이름은 드러남과 명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장면에서 왜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이 대립하고,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풀면, 유대지도자들이 동요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그들이 소유한 권세와 이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권세와 이름이 곧 유대 지도자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하는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힘에 동의하지 않고,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복음으로 선포하고 있으니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걸림돌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무슨 권세로, 어떤 이름으로, 세상은 늘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 성공하려면 우리들이 어떤 힘의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10절에 베드로가 담대하게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알아야 한다”는 γνωστός gnostos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알아야 한다”는 의미보다 “이미 알고 있다”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10절에 전하는 베드로의 말씀은 “당신들은 이미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병 고침의 기적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기적이 일어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선언에는 “예수의 능력”이 “당연히 이런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유대 지도자들과 이스라엘이 알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당신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대하는 권세와 이름

그렇게 힘에 대해서 이름에 대해서 궁금해하는데, 그 힘과 이름의 주인은 이미 당신들이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찾는 이름과 권세는 아무 능력이 없고, 12절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고 구원받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본문에 베드로의 이 담대한 선언에, 유대 지도자들이 머뭇합니다. 13절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는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대히 말하는 것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확인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힘과 이름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드러낼 만한 것에서 힘과 이름이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운 것이 없고, 보잘것없다”는 생각은 아마, 예수님의 부재 즉 예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보잘것없고 힘이 없을 것이라는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베드로의 말씀에 유대 지도자들이 머뭇하게 된 것입니다.

14절에, 이런 이유로 유대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트집을 잡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0:11-18; 선한목자와 삯꾼

평행본문 중 하나인 요한복음10:11-18에는 예수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한목자와 삯꾼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나, 삯꾼은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선한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실 것이라는 이야기로, 곧 임박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선한목자와 삯꾼은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 둘의 분명한 차이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를 선한목자라고 부르고, 자신이 살기 위해 양을 버리는 자를 삯꾼이라고 부릅니다. 삯꾼은 영어 성경에는 “Hired Hand, 즉 고용된 일꾼”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선한목자와 삯꾼의 숨겨진 차이는 자신이 받은 수고 만큼만 일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을 더 희생해서 사랑하는 자인가의 차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유대 지도자들이 이야기하는 권세와 이름은 바로 “받은 만큼 수고한다는” 삯꾼의 영역과 가까이 있는 것이고, 제자들의 방향은 “선한목자”와 같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생명을 살리려는데 가까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한1서3:16-24;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또 다른 성경인 요한1서 3장 16절-24절에 보면, “선한목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특별한 제자들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6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우리들이 그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러니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는 초대교회에 매우 도전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에게 그것도 한 100년이 지난 교회 공동체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지는 18절에 보면,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그리고 하나님 앞에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5-12, 요한복음 10:11-18, 요한1서 3:16-24 : 그리스도인의 권세와 이름

사도행전의 말씀과 요한복음, 요한1서에 연결된 내용은 과연 우리는 어떤 권세와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느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요한복음과 요한1서보다 먼저 기록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힘과 이름으로 변화되었고, 그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유대 지도자들과 구별된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좀 더 예수님의 음성으로 구별된 삶의 방향이 곧 “선한 목자”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한목자와 대조되는 삯꾼은 유대 지도자들이 기대하고 있던 권세와 이름에 의존하는 존재를 대표합니다. 요한1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 구별된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할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확신을 얻을 수 있느냐는 교회공동체의 질문에 사도행전과 요한복음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이나 혀로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고, 함께하는 이 중에 아파하는 이를 위해 희생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들이 어떤 권세와 이름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진리 가운데 있고, 구원의 확신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과정: 변화는 반복돼도 복음은 변함이 없다.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 부활 이후 제자들과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보는 급박하고 정신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복음을 연결하는 작업은 여러 가지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성령 받은 후 변화되었고, 변화된 제자들은 긴박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현장을 누볐을 것입니다. 정신없이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다 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교회 안에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부딪치는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들이 읽는 바울서신은 모두 이런 쏟아진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한 바울의 노력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문제에 부딪히면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하나님 나라의 의미, 그리고 성경이 가르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향을 확인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과정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늘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주어지는 컨텍스트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을 통해 교회는 새로운 시대에 주어지는 질문에 답을 하고, 시대를 관통하고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을 통해 우리들이 확인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들은 똑같은 권세와 이름으로 능력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가끔 신앙생활이 막연하게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것 같은데, 변한 것은 별로 없고, 교회 다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도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이 고백한, 우리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삯꾼이 아닌 선한목자로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으로 그 권세와 이름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더 간단히 입술만 아닌 삶으로 드러나는 사랑으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진리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구원 가운데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런 초대교회의 노력을 기억하며 지금 우리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두 가지 상반된 경험: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권세와 의지할 이름

지난주에 화성에 인지뉴이티라는 소형 헬리콥터가 비행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지구의 밀도에 1%에 불과한 대기 때문에 날아오를 수 있는 충분한 양력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었는데 그 어려운 부분을 빠른 회전력으로 극복함으로 비행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첫 번째 비행에 성공한 지 118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그냥 30초간 제자리 비행을 했을 뿐인데 지구에서 원격으로 화성에서 첫 비행을 성공한 것은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면서도, 우리들은 인류의 진보된 기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첨단 기술이 엄청난 물량의 후원으로 진보하는 중에 아직도 하루에 24,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고, 지구상에8억 명 이상이 영양실조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중적 삶의 방향은 오늘날 예수를 믿고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특별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들의 권세이고 우리들이 자랑할 이름입니다. 요한1서에서는 우리들이 자랑할 권세와 이름이 우리들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드러날 것이고,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야말로 예수 믿는 자의 삶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합니다.

아마 끊임없이 우리들이 경험하는 삶은 진보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허덕이는 현실과 마주할 것입니다. 보통은 내가 고통받지 않는다면, 내가 굶주리지 않다면 세상이 기대하는 권세와 이름을 위해 살아가겠지만, 우리는 내가 고통받지 않아도, 내가 굶주리지 않아도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굶주리는 자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고 새로운 권세와 이름에 소망을 두는 사람이 우리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를 믿고, 왜 교회를 다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예수가 바로 우리의 권세이고 드러낼 이름이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삶은 진리 가운데 놓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구원의 확신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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