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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7주, 5월13일 주일예배 설교




에베소서 1:15-23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


삶의 철학: 내가 살아가는 방식

가수 중에 김진호라는 분이 있습니다. SG워너비라는 그룹의 막내로 알려져 있고, 소몰이 창법으로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최근에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근황이 알려졌는데, 큰 기획사에서 활동할 수 있지만, 수익을 내지 못하면 민폐가 될 것이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서 1인 기획사를 만들어서 활동한다고 합니다. 원칙 중에는 대학 축제에 학생들 등록금으로 거액의 출연료를 지급하게 만드는 브로커들과 연결하지 않기 위해 대학 축제에는 무료로 공연하고있고, 고3졸업식, 병원에서 무료 공연을 하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자기를 위해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는 노래방에 아들을 데리고 간 이야기, 자기는 노래를 부르는데, 옆에서 피곤하셔서 주무셨던 어머니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이 가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유는 삶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수는 노래를 불러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공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그런데, 그런 일반적인 방향이 아닌, 자신이 유명 가수임에도 자신의 삶의 기준, 이것을 조금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신의 삶의 철학이 세워져서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마음먹는다고 해서 삶이 마음 먹으로 대로 되지 않습니다. 무료로 가수 활동을 하겠다는 것은 무명가수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철학, 혹은 원칙 이런 것들이 만들어지니까, 단단한 신념 같은 것이 생겨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삶을 결심하고,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는 삶의 방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바울의 철학,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

오늘 읽은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베소서는 62년경에 바울이 감옥에서 기록한 서신 입니다. 최근에 학자들에 의해 바울의 저작성, 즉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초대교회에 전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바울 신학의 왕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바울이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 그리고 성도의 삶에 대해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특징은 예수님이 곧 교회의 머리로, 우리들이 모두 그리스도 몸 된 교회로서 “하나”이고 “함께”하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만큼 교회가 다양해지면 교회마다 다른 모양, 다른 신앙의 형태로 통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경험하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마다 교회의 분위기와 교회마다 특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초대교회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교회의 일치와 신학적 정리가 부족하다 보니,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것에 대해 불편해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에베소서는 바울이 고백하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교회에 대한 철학, 신념, 혹은 우리들의 용어로 보면, 신학적인 정리를 위해 쓰인 편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어떤 철학,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하나님을 아는 것~!

15절-16절에 보니까, 바울이 감사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한가 하면, “예수님의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을 듣고서는 바울이 감사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17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성도 간의 사랑이 교회 안에 충분하다면 그다음 단계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교회가 이루어 가야 할 그다음의 신앙의 단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σοφία sophia, 영적인 지혜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고, “계시”는 ἀποκάλυψις apokalupsis라는 말로 “드러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드러남 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Apocalypse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말”, “묵시”라는 말로 사용하고, 실제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하지만, 원래 성경의 의미는 “하나님의 비밀이 들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성도를 사랑하고 그다음 단계에 노력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들춰내주는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이런 단계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들의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καρδία kardia라는 말로 우리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느낌이 환하게 밝혀져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속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절을 통해 믿는 사람인 우리들을 통해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9절까지 말씀을 통해 바울이 어떤 철학,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고, 교회는 어떤 철학과 방향이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기초적인 것은 “예수를 믿고”, “성도 간에 사랑” 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한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목적, 즉 우리들이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에 교회, 신앙생활의 방향에 대해서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들은 선교가 신앙생활의 중심이고,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 이후에 일어날 사건인 휴거에 신앙생활의 정점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불같은 기도와 열심만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를 믿는 믿음과 성도의 사랑을”기본으로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고, 방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으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확신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고백하고 본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신학

바울이 여기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은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필요한 가르침, 즉 바울이 깨닫고 고백하는 바울의 철학적인 사고가 담겨있습니다. 이것을 이후에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바울이 고백하는 교회와 성도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오늘 읽은 본문에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철학”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철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가 이야기해도 흔들리지 않는 철학적인 삶의 모양이 누구나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고집이라고 표현하는데,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자신의 철학적인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실천하고자 하는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모양 중에 하나 일 수 있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분명한 삶의 신념, 혹은 확고한 삶의 방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철학, 신념이라는 것이 없으면, 삶의 방향은 불어오는 바람에 아주 심하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런 철학, 즉 신학적 노력이 없었다면,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쓰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믿음에 대한 증거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바울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여준, 철학, 신학은 우리들도 든든히 세워야 할 그리스도인의 덕목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어야 할 철학과 신학

“예수를 믿고, 성도 간에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가 되는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은 지금 우리들도 지녀야 할 기독교인으로서의 절대 흔들림 없어야 하는 신학적, 철학적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이 이어가야 할 신학적인 태도인데, 이것도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마음의 눈이 밝혀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망”이 무엇이고,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풍성한 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신학적 철학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전제를 붙이며 철학과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의 믿음과 신앙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나름대로 철학과 신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철학, 신학 하면 부담스러운 용어이고 왠지 어려울 것 같은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우리에게 필요한 것, 즉 흔들림 없이 우리들의 믿음을 세워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무너지는 교회, 철학과 신학의 부재

오늘 읽은 본문과 평행 본문인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보고 하고 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복음서와 교회는 단단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천이라는 개념에 몰입해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어 올라가신 것에만 집중하지만, 교회는 사실 예수님의 승천은 곧, 예수님의 부재 속에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계속해서 증거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직면한 상황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우리들은 2,000년이 지난 이후에도 완벽하게 번역된 문장으로 읽어내고 있어서 잘 못 느낄 수 있지만, 이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황은 매우 절박하고 진지했으며 늘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하여 전할 수 있을까? 가 큰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이 고민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민들을 신학적, 철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학, 철학 하니까, 어렵게 느껴지시겠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흔들림 없는 신앙”, “분명한 방향성”,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할 복음의 진수”를 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시면 될 듯합니다. 이런 노력으로 우리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고, 교회는 지금도 세워지고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변함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신학의 부재, 교회의 위기

그런데, 요즘 교회가 위기 속에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보면, 교회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전에 교회는 멋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매력이 있었고, 감히 엉성하게 신앙생활을 할 바에는 준비가 되면 교회에 나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교회가 위기이고,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교회가 철학, 즉 신학”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동안 신학이 교회를 망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무조건 교회에 사람만 모을 수 있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가치, 지금까지 지켜온 교회의 신학, 철학이 가볍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중에 쉽게 찾을 수 있는 결과는 “교인의 고령화”입니다. 저희 교회는 조금 특별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이웃교회들의 고령화는 심각합니다. 이 말은 더 이상 다음 세대가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역동적이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전통보다는 자신들이 세워놓은 전통들이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고, 또한 빈번하게 교회 공동체가 이 세상과 함께 공존하는 영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행위를 통해 교회의 위기는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참 심각했을 때 이를 대처하는 교회의 모습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문제의 원인을 방역당국이 교회를 차별한다는 프레임으로 맞서려고 했습니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 걸고 예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서 남들의 목숨을 위태하게 한다면, 모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혀서 세상을 돌보는 일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볍게 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도 분명한 철학과 신학적인 이해가 없다 보니까, 흔들리는 대로 흔들립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바로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과, 우리가 바로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의 모양이 있지만,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연약 해지는 교인들을 위해 교회는 날카롭고 우리의 심장을 흔들어놓는 메시지를 나누지 못하고, 늘 기쁨과 축복으로만 연결되는 메시지는 교회를 더 어렵게, 성도를 더 연약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성숙하게 하기 위해, 영적 독서, 기도모임, 성경공부를 통해 신앙이 성숙해지도록 노력해야만 그나마 조금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성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바로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들이 세워야 할 철학적, 신학적 고백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시면서 흔들림 없는 신앙을 드러냄으로 다시 한번 교회를 희망의 공간으로 세워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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