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8:4-11
믿음으로 말하기
우리에게 왕이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나이 든 사무엘 앞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찾아와 이스라엘에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로서는 매우 큰 변화를 위한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예언자이면서, 제사장 그리고 사사로서 활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지파 체제로 나라를 운영하였습니다. 위기가 닥칠 때, 하나님이 사사를 선택하셔서, 12지파를 묶어내서 전쟁을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 시간을 “사사 시기”라고 부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활동 중, “삼손”과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의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로서는 재미있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지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사사들의 활동은 주변 다른 나라에 비해, 그 구조가 열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을 치를 때, 왕권을 갖춘 다른 나라들은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으로 일사불란한 시스템을 갖추고 전쟁에 임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점에서 늘 수세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는 것에 속도를 못 낸 이유는 우선, 애굽에서 왕은 곧 신이라는 공식에 있었기 때문에 왕을 세운다는 것이 자칫 우상을 세우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로 가장 큰 걸림돌로 지파 간의 경쟁구도에서 어느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인가?에 대한 일치된 의견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마침 그때, 곧 왕을 세울 수 있는 시간이 왔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필요와 모험 사이에 갈등
이스라엘 장로들이 들고 온 왕을 세워야 하는 합리적 이유 중 첫 번째는 사무엘이 나이가 많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사무엘이 자식 농사를 잘 짓지 못했으니, 사무엘을 이을 후계자를 세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장로들의 요구에 사무엘이 마음이 상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라는 이유를 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왕을 세워줄 것을”요구해서 그런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사무엘은 상한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받은 응답이 왕을 세우면 왕이 백성들을 향해 어떤 권한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 읽을 본문의 마무리 내용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왕”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지평은 왕권 국가에 대한 이스라엘의 열망과 필요가 존재했고, 제사장 이데올로기와 왕권 이데올로기의 갈등의 시작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고대 근동 국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당시에 왕권을 세운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필요조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필요하지만, 쉽게 할 수 없는 상황, 변화의 중심에 있지만, 변화를 주기에는 부담이 되는 상황이 아마 사무엘과 장로들의 입장의 차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지만, 바라보는 것이 다르고, 선택이 다른 경우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긴 팬데믹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15개월 이상을 속히 코로나바이러스를 끝나기를 소망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딪히는 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고, 이제 막상 모든 것이 정리되어가는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되다 보니까, 약간의 불안함과 부딪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매년 진행되던 유스를 위한 수련회가 올해는 대면으로 캠프 형식으로 진행됨을 알려왔습니다. 준비하는 분들이나, 사역자들, 교회마다 부딪히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르다는 분도 있고, 속히 예전처럼 수련회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니, 이것을 진행하는 조셉 목사님의 고민이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판단, 어느 방향이 정확하고 옳은지가 궁금하겠지만, 옳고 그름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변화와 어떤 기대가 있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험하는 상황은 똑같은데 반응이 다른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생각과 이해관계들이 있다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과 분명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는 교훈을 얻게 합니다.
다르지만 결국 한 방향으로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장로들과, 사무엘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 온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방향이 옳고 그르냐 보다, 어떤 변화와 어떤 기대가 있느냐에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가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본인이 나이가 들었고, 자신의 자녀들은 사무엘이 감당했던 일을 감당하기에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도 않았고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서 뇌물을 받는 존재”로 이미 사무엘의 일을 감당하기에는 자격 얻지 못하는 현실에 사무엘은 부딪혀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역할이 예언자이면서, 제사장이었고, 재판관이라는 큰 역할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감당하고 있어도, 자신의 자녀들이 그 책임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으니 변화와 모험이 필요한 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왕을 세워야 하는 현실에 마주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 사무엘은 그 현실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중한 방향을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주어졌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한 것이 “왕을 원한다면, 왕이 어떤 권한을 갖고 사는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 사무엘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의 해석: 엉뚱한 방향으로 갈 때도 있다.
오늘 읽은 본문과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3:20-35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원초적인 반응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가장 도드라진 사역은 “귀신을 쫓는 사역”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사건 보다 우리들이 이 본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악한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기만 해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해석이 다양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황당한 반응은 율법학자들의 반응인데, 이들이 생각한 예수님의 능력은 귀신의 대장인 바알세블의 힘을 빌려서 이런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같은 상황에 대한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귀신이 있고, 예수를 바알세블, 즉 귀신 대장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율법학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귀신도 알아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능력을 율법교사들이 대장 귀신의 힘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기적 사건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기적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기존의 종교적 행위와는 다른 전혀 다른 방식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어색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보면,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향하고 있지만, 기존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 보다”, “자신들이 누리는 종교적 권리”에 더 관심이 있다 보니, 쉽게 예수님의 복음,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들의 심장을 폐부를 꿰뚫는 말씀이었고, 지금까지 율법교사들이 세워온 모든 것을 흔들어대는 사건이다 보니까, 예수님의 기적을 귀신의 힘을 빌려서 쓴 것으로 왜곡하는 것을 그들은 선택했던 것입니다.
숨겨진 것을 찾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
이 두 성경 본문에서 우리들이 함께 마주하는 것은 왕을 세우는 모험적인 행위가 사무엘에게 도전적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 그리고 기적 사건이 당시의 율법교사들에게 도전적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결국 왕을 세우는데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대적 요구와 필요를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들을 읽어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존의 율법교사들이 해석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들의 삶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에서 늘 경험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동행하는 가운데서도 대부분 부딪히는 경험들은 사람들의 지혜나, 누군가의 조언을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거의 이런 일들은 가벼운 고민 혹은 이야기함으로 풀려지는 흔히 우리들이 생각할 때 가벼운 고민정도라고 할 수 있는 것에는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고난스러움에는 누군가의 조언보다는, 간절한 간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보통의 신앙인들의 자세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문제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고민하게 되는데, 이 고민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몰아갑니다. 기도를 통해 어려움과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매우 간절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통해 우리들의 어려움과 고난이 순식간에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또한 우리들은 마주하게 됩니다. 생각만큼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되지도 않고, 때로는 생각한것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내야만 하거나, 예상치 못한 다른 삶이 부딪히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고민으로 삶을 몰아가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들이 질문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은 과연 나의 고난과 어려움을 알고 계신가?”에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반응으로 대할 때는 “하나님을 부정” 하거나, “신앙에 대한 회의”, “믿음에 대한 의심” 이런 것들이 자리할 때도 있습니다.
같은 눈높이: 성경과 우리들의 삶의 고민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두 성경 말씀과 우리들의 삶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부딪히는 삶의 고민과 이스라엘이 왕을 원하는 고민,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을 대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비슷한 눈높이에서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왕을 세우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왕이 세워짐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은 가볍게 여기면서 생긴 간절함이고, 예수님의 기적을 대하는 율법교사의 고민은 눈에 보이는 기적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지 못해서 나오는 마음이고, 우리들의 삶에서 부딪히는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간절한 기도는 평소 좋은 일이나, 평범함 속에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해 내지 못하면서 자신의 조급함에 하나님을 재촉하는 것인 만큼, 같은 눈높이에서 사무엘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을 대하는 율법교사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는 같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으며 말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기대
또 다른 평행 본문인 고린도 후서 4:13-5:1에 보면, 바울은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의 질문은 “믿어서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바울은 “믿는 것과 말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그 믿음은 말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해석이고, 성경을 읽어내고 그것을 믿는 우리들이 당연히 갖춰야 할 자세입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질문이 생깁니다. 즉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생깁니다. 우선, 가장 취약한 것이 믿음이 있는데,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복음을 믿는데, 고난이 생기는 것 때문에 믿는 대로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낙심하지 말고, 겉으로는 낡아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무엇보다 보이는 것을 기대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고백하는 존재로 우리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분량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믿음을 이해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방법은 똑같습니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뜻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이야기 속에서 사무엘은 현실에서 드러나는 필요와 간절함이 과연 보이지 않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하며 생각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고, 예수님의 귀신 쫓는 기적에서 율법교사들이 집중하고 있는 생각은 과연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뜻에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들어있고,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반응은 눈에 드러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기억시킴으로 눈에 보이는 고난에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말씀으로 선포할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씀을 읽어내는 우리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고, 눈에 드러나는 것에 몰입하지 말고,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지만, 중요하고 신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 고백하는 믿음을 통해 말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방법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하기: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코로나바이러스로 긴 단절의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마음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은 우리를 선택으로 몰고 갑니다. 어디는 만나서 함께할 수 있는 자리가 있고, 어디는 온라인으로만 해야 하는 자리를 선택하게 합니다. 이런 와중에 갑작스러운 질병과 마주하며 삶을 씨름하며 살아가는 분도 계시고, 자신의 성향과는 맞지 않지만, 함께 동역해야 하는 책임으로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과 일치됨으로 일을 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하루하루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주어진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 혹은 이웃을 마주하기도 하고, 멀리 있지만, 군사정권을 끊어내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이들을 마주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인종차별과 혐오로 인한 폭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정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의 무엇인지, 인간 다움이 무엇인지를 용기 있게 표현하고 있는 분들을 목격하고 있고, 가까이에서는 새로운 여정을 위해 씨름하는 자녀들, 은퇴한 이후에 새로운 삶에 적응해가는 부모들을 마주하는 우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팬데믹으로 갑작스럽게 직장을 옮기거나 멀리 이주하는 분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에는 한 공동체였지만, 팬데믹을 보내면서 어찌할 수 없이 떠나보낸 동료와 친구들, 청년들의 고민을 마주합니다. 이런 현실을 우리들은 마주하지만, 결코 눈에 드러나는 것에 흔들리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보이지 않음에도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소망하는 존재로, 믿는 대로 말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 우리들의 삶이라고 고백하는 책임에 우리들의 삶이 놓여있음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삶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방향을 향해 눈을 마주하냐에 따라 삶이 크게 달라집니다. 늘 선택이라는 숙제가 무겁게 주어지지만, 선택은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한다는 고백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면, 우리들의 믿음은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과 선택을 통해 풍요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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