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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후 4주, 6월20일 주일설교 원고


David and Goliath by Michelangelo, on the Sistine Chapel ceiling

사무엘상 17:32-49

마음 넓히기


우연성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의 역할 확장하기

세상을 살면서 우연성에 의해 소속할 때가 있고, 필연성에 의존하여 소속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 아시안, 남자, 여자 뭐 이런 구분은 필연성에 의한 소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한인 이민자, 베이지역에 사는 한국인, 모태신앙으로 기독교인, 지지하는 정당 등이 우연성에 의해서 소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필연성에 의존한 소속은 바꿀 수 없지만, 우연성에 의존한 소속은 지속적으로 그 카테고리안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신앙을 든든히 지켜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교인은 절대로 필연적인 존재로 한 교회공동체를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열린교회는 성도를 떠나 보내는 경험이 많은 공동체입니다. 펜데믹 기간에 제가 경험한 떠남도 적지 않습니다. 직장때문에 떠난 사람, 공부를 마치고 떠나는 사람, 멀리 가는 사람, 정말 멀리 가는 사람등을 경험하면서 한 교회에서 수십년을 다닌 분들은 정말 많은 분들을 떠나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떠나 보내는 경험이 많은 교회 공동체라는 의미는 다르게 보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눈 분들을 멀리 파송하는 경험 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온 거룩한 물이 온 땅을 거룩한 생명을 뒤덮는 환상을 보는 내용이 나오는데,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목회하는 기쁨과 비전을 물으신다면 저는 여러분들의 경험을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를 통해 흘러간 많은 분들이 어디선가 우리와 비슷한 생각과 풍족하게 습득한 자양분으로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운 여름이 오고 그 너머에 가을과 겨울이 기다리듯 우리들은 늘 비슷한 시간을 경험하면서 그 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가리라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누리는 특별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많이 모이는 것보다 흩어지는 것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에너지를 세상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을 우리들이 함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자신이 교회 되기: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읽은 본문도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책을 하나 추천 하자면, 김영봉 목사님의 “나는 왜 믿는가?”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믿음을 지키기 힘든 시간을 살아간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이런 질문 앞에 학자이면서 목회자로서 진솔하게 자기 고백과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는 왜 믿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책인 것 같아 기회가 되면 함께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소개를 드립니다. 제가 이 한주간 이 책을 붙들고, 이분이 이야기하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에,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이해를 씨름하면서 느낀 것은 결국,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져야 되고, 세워져야 하고, 고백 되어 져야하는 것이지 결코 누군가가 고백한 믿음으로, 혹은 누군가가 그렇다고 이야기한 것에 의해 “내 믿음”이 생기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물론, 믿음의 좋은 멘토가 있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 믿음이 성숙해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내가 고백한, 즉 자기 고백없이 믿음이 생기거나, 믿음이 성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의존적 믿음에서 자발적, 혹은 자립적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를 모색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주시는 은혜: 의존적 믿음 벗어나기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들에게 차고도 넘치게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때 한번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은혜의 물줄기는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믿음생활하기 쉽지 않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신앙이 예전 같지 않고, 교회도 예전 같지 않다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사람들이 줄어들고, 젊은 사람들 중에서는 교회 다니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독교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예전 같지 않게 은혜를 약하게 주셔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예전처럼 경험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하고 계시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이끄신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고, 바울이 경험한 부르심이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전 같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합니다. 왜 입니까? 기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도 넘쳐나는데…,주님 저 말고 저 옆에 있는 친구를 불러주세요라는 의존적 믿음으로 우리들은 가만히만 있어도 믿음이 생기고 거기에 믿음이 성숙 해지길 바라니까, 하나님의 은혜도 예전처럼 경험하지 못하고, 기독교인들도 예전 같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나안땅의 강자 블레셋

오늘 읽은 본문은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을 일약 이스라엘의 스타로 만든 사건, 그리고 이후에 온 인류가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재미있어 하는 유명한 스토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후에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블레셋과 오랫동안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몇몇 나라들이 있었는데, 블레셋은 서쪽 바닷가를 중심으로 철기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철을 다룬다는 것은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핵무기를 보유한 것과 맘먹는 무력을 소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블레셋의 세력은 가나안에서 가장 강력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서쪽에 블레셋이 위치해 있었으니,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팔레스타인지역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사울이 마지막 사사이자 첫번째 왕으로 블레셋과 전쟁에 임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보면,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통해 이야기 전체에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우선, 다윗이 등장하기 전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이 들고 있는 철기 무기에 주눅이 들었고, 골리앗으로 불리는 블레셋 거인 장수의 기세에 이스라엘이 사기를 잃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앞선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군대는 단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전쟁을 치루기도 전에 눈에 보이는 것, 그럴 것이다는 짐작에 이스라엘이 사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번째 긴장을 이끄는 또 하나는 사울은 이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영웅”이 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고 자신의 사위로 맞아들일 뿐만 아니라, 집안에 모든 세금을 면제하겠다고 공표합니다. 이 세가지 상황을 통해 “다윗”을 역사의 현장으로 초대되어지고, 가장 주목받는 상황에서 다윗은 골리앗과 대면하게 됩니다.


다윗과 사울:주님과 함께하는 자 VS 눈으로 보는자

다윗이 사울 앞에 나섰을 때, 사울도 눈으로 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만 두어라, 네가 어떻게 저 자와 싸운단 말이냐?” 다윗은 자신의 양치기 경험으로 사자를 물리치고, 곰을 물리친 것을 이야기하면서 사울을 설득합니다. “주님이, 저를 살려주 실 것입니다.”라는 다윗에 고백에 사울은 자신의 투구와 갑옷을 입혀줍니다. 소년인 다윗이 사울의 갑옷과 투구가 맞을 리 없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사울이 설득되었지만, 여전히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고 그나마 도움이 될만한 것을 다윗에게 걸쳐주려고 합니다. 몇 발짝 걷기 힘드니 다 벗어버리고,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목동의 지팡이, 시냇가의 돌 다섯 개, 그리고 무리매를 들고 블레셋 진영으로 나아갑니다. 다윗의 선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든든하게 할지 모르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버리고, 자신이 늘 손에 쥐고 있던 것들, 즉 익숙한 것을 들고 골리앗과 대적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당연히 블레셋이 이런 다윗을 비웃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비웃으며 공포스러운 말로 다윗을 겁박합니다. 이런 블레셋의 엄포에 다윗이 받아칩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간다.” 이 유명한 고백을 한 후, 다윗은 자신에게 익숙한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을 전쟁의 승리로 이끈다는 것이 오늘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다윗과 사울- 믿음은 주어진 것을 통해 성장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의 삶으로 연해보면, 보여지는 현실과 우리들이 가진 꿈과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의지하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으로 가르쳐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견지에서 보면, 다윗왕조의 전통이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미세하지만, 우리들이 읽어내야 할 본문의 흐름은, 골리앗과 다윗의 갈등 구조보다는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더 관심이 가는 것이 오늘 본문의 흐름인 듯 합니다. 사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경험과 보여지는 것에 기대서 이야기를 끌어가려고 하고, 다윗은 상황에 맞지 않지만,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통해 현실에 부딪힐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판단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상황을 점검하고 마땅한 현실적인 판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배운 합리적 교육의 결과물들입니다. 실제로 계몽주의 이후에 인류는 합리적 선택을 위해 노력하고 훈련해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합리적인 행위는 이보다 오래전부터 드러나지 않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보고 느끼고 판단한 것을 의지해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골리앗은 블레셋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들의 판단은 경험하지 않은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두려움에 삶을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예상치 못한 인물인 다윗이 등장하는데 다윗은 사울과 다른 이스라엘과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다윗이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에게 익숙한 목동지팡이와 양을 지키면서 능숙해진 돌팔매질과 돌멩이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주님이 나와 함께한다는 믿음”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인 다윗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골리앗을 물리쳐냅니다. 다윗이 선택한 것이라고는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통해서, 늘 일상적인 것을 통해서 현실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기적 혹은 믿음의 결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과 믿음의 열매는 특별한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가장 흔하고 편안한 것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다윗의 선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 판단에서는 골리앗을 이길 장수는 더 크고 힘이 더 센 사람이 등장하고 칼과 방패 혹은 그보다 더 막강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기적은 나이도 어리고, 칼과 창도 다루지 못하지만, 자기에게 익숙한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트렸으니, 우리들이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하는 기적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통해 일어나고, “우리들이 경험하는 일상”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는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의 열매, 혹은 믿음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믿음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충분히 믿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내가 믿음 좋은 누군가 처럼 된다면, 나중에 시간이 많아진다면, 물질이 풍족해진다면, 지금의 삶보다 더 좋은 삶을 살게 된다면… 그때,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힘들어도, 지금 부족한게 많이 있어도, 지금 당장 시간을 낼 수 없지만, 그런 현실에서 주어진 것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와 비슷한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가 성취되었을 때 생기는 것도 아니며,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것을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적 경험하기: 마음 넓히기 – 믿음의 필수조건

고린도 후서 6장에 보면 바울은 사람들이 은혜의 때가 오면, 하나님의 시간이 오면 그때, 열심으로 그리스도인 답게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지금이 은혜의 때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후서를 썼던 바울은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맞음, 감옥에 갇힘을 경험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누가 봐도 바울의 현실은 암담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때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바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저런 현실적인 경험과 상황때문에, 마음이 좁아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요청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 놓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넓어져야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경험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몰입하다보니, 마음이 좁아져 있어서 현실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의 경지에 있는 다윗이 행할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넓히면, 담아둘 수 있는 여유가 많아지면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지금 내가 익숙한 곳, 그곳에서 바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때보다 가득하며,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넓히기를 통한 기독교 바로세우기

엔도슈샤쿠의 소설 “침묵”에 보면 로드리고 신부가 자신이 배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죽어나가는 신자들을 보면서 충격에 빠집니다. 자신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이미 배교한 것도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의 성화상”을 밟고 지나가는 배교를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도 예수의 성화를 밟음으로 신자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죽어나가는 신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 것에 로드리고 신부는 질문하게 됩니다. 신자들이 순교하고 죽어나가는 현장에, 주님은 어디계신가? 순교를 고집하지 않고 성화를 밟는 행위가 배교를 의미한다지만, 자신이 이렇게 해서라도 신도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어쩌면, 주님이 이끄시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기독교신앙에서 믿음은 주어진 교리를 절대적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되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삶도 생명을 일으키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교리나 전통으로만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넓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의 삶의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넓은 마음을 갖는 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볼 수 도 없는 것도 여유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한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몰아치듯 시간에 밀려 살다 보면, 나 자신을 돌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매주 예배당을 찾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넓혀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깊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고백하고 우리 안에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믿음이 넓어지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 주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확신 또한 갖게 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어느새 좁아져 버린 마음의 크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넓혀 믿음을 크게 세워서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넘어선다는 것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을 위해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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