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11-22
성령이 거하실 처소
이야기: 소통과 타이밍
곧 8월이 다가옵니다. 올해 8월은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달입니다. 2011년에 저희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벌써 10주년을 맞는 시간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빠른 것도 놀랍지만, 평생에 아버지와 해결해야할 숙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차일 피일 미루다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을 경험하면서, 늘 후회하는 시간을 보내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억으로는 그때, 미국으로 오기로 마음 먹은 중요한 계기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는 후회와 미련에 떠밀려 미국에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살면서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야기하는데, 10년을 지내고 보니까, 타이밍이 어긋난것 도 내 삶의 일부라는 “받아들임”의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어떤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한번도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하루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 아들로서 느끼는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마음먹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가, “엄마 바꿔주마..”라고 전화를 돌리려고 하자, “아니에요, 아버지, 아버지께 할말이 있어요~!” 그랬더니,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돈필요하냐?” 그게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고는 이런 저런 아버지의 고마움, 느꼈던 사랑, 그동안 잘 표현하지 못한 미안함을 나름 최선을 다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하시는 말이 “너 술마셨냐?”
하나님과 소통
웃픈이야기입니다. 소통을 자주 하지 못하다 보면, 진심을 전하는 것 조차 힘들기도하고, 요즘은 안그렇지만, 대부분 아버지들이 겪는 마음은 아닌데, 무뚝뚝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의 끄트머리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런 마음도 들었습니다. 우리들이 늘 하나님과 관계하고,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알고 기도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하는 대화도 이와 비슷하면 어쩌나? 신앙생활중에 우리들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을 게을리하다 보면, 자 이제 맘 먹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해야지 했을 때, 혹은 타이밍을 기다리다가 좋은 시간이 오면 다시 예전처럼 신앙생활에 열정을 다해야지 했을 때, 생각했던 것만큼 어려워하는 교인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움: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신앙생활 하는 분들의 스타일이 모두 똑같지 않기때문에 사람들마다 주님을 마주하는 행위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것이 맞고 틀리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과 교제를 하게 되죠. 어찌되었든 신앙생활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경험하고 고백하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느날 주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하면, 혹은 철저하게 무시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우리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신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으면서 깊은 생각으로 이끌려 갔습니다. 버트런트 러셀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문학작가로 알려져있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분이죠. 그런데 이분은 철학자로도 유명합니다. 당시에 분석철학자로 알려진 비트겐슈타인에 영향을 받고, “언어철학”이라는 개념으로 이같은 논리적 부제, 즉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신다면, 우리들의 간절하 기도와 대화에 적극적으로 응답 하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원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러셀은 영국에서 유행했던 경험론과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과 자신이 신봉했던 수학적 논리에 근거하여 “신앙”도 이런 논리적 경험 속에서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때문에 신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 혹은 내가 이해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부딪히는 현실에서는 불확실하고 전혀 마음에 감동이 오지 않을 때,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고백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켜갈 수 있을까?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성경 이야기
오늘 읽은 본문을 나누기 전에 평행 본문인 사무엘하 7장을 읽어보면, 다윗이 자신의 왕궁을 다 짓고 나서, 여전히 성전은 천막이라는 것에 마음이 찔려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안에 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다윗은 성전을 설계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본문을 읽다 보면, 다윗이라면 먼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짓고나서, 자신이 거할 처소인 왕궁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잠깐 멈춰서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들을 가끔 혼란 스럽게 하는 것은 신앙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교회란 이런 것이라는 것, 혹은 믿음이 좋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들이 우리 안에 깊숙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축복하심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왕들의 기준이 될 만큼 훌륭한 다윗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거할 처소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먼저 돌봐야 하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도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궁전을 백향목으로 지어 놓고는 그때서야 하나님이 거할 처소인 성전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어쩌면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 틀과는 다른 내용들이 성경에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경험하고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잠깐 모세가 시내산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에서는 어땠습니까? 애굽에서 먹던 고기가마가 그립다고들 불평합니다. 성경은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르고 달래며 출애굽을 완성하시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이스라엘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분명히 이런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늘 감격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이 늘 불순종하고, 심지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서지 못한 부족한 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논리적 신앙생활 : 복음의 비밀 1
신앙생활은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논리와 개념 혹은 우리 안에 자리한 어떠 틀로 신앙생활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목사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더 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난 분의 부르심을 작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무게는 똑같습니다. 역할이 조금씩 다를 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무게는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고백을 통해 세상과 교회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차별을 두고 삶을 나누지만, 하나님 앞에선 우리들은 모두 똑같다고 우리들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이 마치 율법이 잘못되어서 예수님이 없애시려고 노력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 율법을 통해 우리 안에 오랫동안 자리하게 된, 틀 혹은 그 틀로 인해 만들어낸 여러가지 넘어설 수 없는 고정관념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폐하시겠다고 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틀들은 이런 것과 같을 것 같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어느 수도원에서 예배를 드릴 시간에 기르던 고양이가 하도 정신없이 굴길래, 예배시간 전에 미리 고양이를 예배당 앞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100년이 지났더니 고양이도 늙어서 세상을 떠나고 그 수도원을 지키는 사람들도 세상을 떠나고 다른 수도사들로 채워졌는데, 예배를 드릴 때 없던 고양이를 잡아다가 묶어놓고 예배드리는 전통이 그 수도원에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실 때,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것보다도 자신들이 이해하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종교적 규범의 틀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묶어내는 “틀”은 건강한가? : 복음의 비밀 2 (틀을 깨는 힘)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이 이런 종교적 규범의 틀을 예수님의 복음이 어떻게 그 틀을 가로질러 우리들에게 복음이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특유한 논리적인 어법을 통해 이방인들이 어떻게, 여기서는 에베소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11절과 12절에는 구원받기 전에 에베소 사람들, 즉 이방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방인들은 육체적 즉 눈에 보이는 것은 이방인이고, 할례받지 못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다고 여겼고, 하나님의 약속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 없이 살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니까, 예수님의 피로 이제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틀과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보면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니 사실, 꼼꼼히 율법을 살펴보면,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가 늘 있었는데도, 유대인들이 마련한 전통이라는 틀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평화라는 이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갈라져 있었는데 이 둘을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셨기때문에 예수님을 평화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복음은 갈라내고, 편을 가르고 경계를 세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갈라져있고,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만들어진 것을 허물어 냄으로 하나로 엮어내는 방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다는 사실입니다.“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다”는 찬양으로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가는 방향으로 초대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임을 우리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확증할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바울의 십자가의 능력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게 하시고, 한 몸으로 하나님이 화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정도로 화해가 필요한 서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여러가지 조문으로 만들어냄으로 이방인들에 대해 경멸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오해, 이런 차별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부름받음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믿는자들을 건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퉁이돌이 곧 예수님이시고 그 위에 우리들이 건물처럼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을 기초로하는 한 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곳이 성령께서 거할 처소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당시의 모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부셔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온 전통적인 방법이 하나님을 잘 이해하는 틀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틀의 큰 맹점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방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틀들이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받을 자들은 자기들이 정하고, 믿음의 큰자와 작은자를 나누기도 하고, 자기들이 정한 율법적인 여러가지 조문을 통해 사람들의 신앙을 평가했습니다. 이들의 삶은 이 “틀”에는 철저했지만, 늘 부딪히는 이웃과 고난 받는자, 혹은 함께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오류를 범했고, 이 것을 하나님 앞에 만족한 삶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도 비슷한 것을 경험합니다. 교회도 많고, 성도도 많고 목회자도 많은데, 세상은 변하질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우리들이 세상에 어떤 책임을 질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고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몰아가는 대로 나도 믿음 있는 척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내 신앙을 내가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개인적인 자리에서만 머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은 “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세워진 벽을 허물고, 차별을 몰아내고, 세상이 몰고가는 관성대로 살아가지 말고, 우리를 몰고가는 것에 쓸려 다니지 말고 내가 만난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한다면 그 자리에서 평화를 만들고 서로를 용납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나와 다르면 경계하고, 갈라내고, 거리를 두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논리에 역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부족함을 늘 깨닫는 사람들이고그, 늘 이 겸손함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경이로움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미는 군림하는 승리가 아니고, 섬김과 회복, 그리고 평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통해 성취되어지는 것임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큰 자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큰 자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랑이 누구보다 앞서거나, 성공했다는 것에는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누구보다도 경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누구보다도 평화를 이루었다는 것으로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성령이 거할 처소입니다. 이 처소는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내가 하는 행위, 내가 바라보는 것, 내가 꿈꾸는 것 모든 것들이 바로 성령이 거하는 처소답게, 예수님을 딛고 세워진 건물답게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타이밍, 마땅한 때, 능숙함에서 나오는 대화도 필요하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능숙하지 않아도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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