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21-43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서 있는 자리: 고난이 늘 함께하는 자리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이 되면, 감당해야할 현실들이 즐비한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것들 부터, 예상치 못한 삶의 무게들이 몰아치면 어떤 숨을 쉬어야할지 모르는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엊그제 플로리다에서 아파트가 붕괴되었습니다. 멀리서 일어난 일이지만, 159명이상의 실종과 사진으로 전해지는 처참함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으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기사로 뽑아내는 내용들은 “동남아에서나 일어날 일이”, “삼풍백화점 미국판”이라는 제목은 이 충격을 넘어서는 또 다른 질문, 불편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몰아치는 감정, 느낌 혹은 예상하지 못한 삶의 무게들 속에 우리들은 신앙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이야기하고, 변함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런 고난과 어려움 속에 우리들이 어떻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다. 신앙이 있다라는 말은 내 삶에 만사 형통, 즉 아무런 고난과 근심이 없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잘 아시겠지만, 믿음이 있어도, 신앙이 있어도 우리들의 삶에는 고난이 있고, 누구나 다 겪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이 이루어져야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 기독교인으로 어떤 특별함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왜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필요한 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플로리다 아파트 사건 기사에 대한 불편함은 우리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비교와 경쟁, 차별에만 치우친 우리들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것을 세상적 판단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교회도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비교와 경쟁, 차별에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요즘에 우리들이 경험하는 기독교인 듯합니다.
성숙한 신앙을 위하여
그러면, 우리들이 기대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이 우리들의 삶에서 어떤 능력이 있을까? 궁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만사형통할 수 없다. 고난이 없을 수 없다. 엄청난 축복도 없으면 우리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무엇일까?가 궁금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무사안일과 축복을 향하고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이런 종교적 인식을 하층적 종교관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하층적 종교관을 넘어서 성숙함으로 이끌어가는 종교를 종교학자들은 심층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디까지나 종교학자들의 구분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들이 확인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수준이 높고 낮고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높고 낮다는 평가는 어떤 것이 더 힘이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숙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평가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숙한 종교냐, 성숙하지 못한 종교냐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들이 성숙한 신앙이냐,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냐를 구분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기적사건을 넘어선 하나님의 방향
오늘 읽은 본문은 이 두가지 질문, 고난이 늘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 그리고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사건으로 읽게 되지만, 그 안에는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해봐야할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이전에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을 열광시켰습니다. 귀신들린자는 물론이고, 바다를 잠잠케한 기적들이 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21절에 보면, “큰 무리들”이 몰려들었다고 기록된 것을 봐서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님께 몰려든 것 같습니다.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특별한 능력에 열광하려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등 이런저런 목적으로 무리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수많은 무리들 중에 두 사람의 이야기로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께 나아왔던, 한 방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도록 이끌어냅니다. 우선, 회당장 야이로가 무리를 뚫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자신의 딸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회당장은 유대공동체안에서 존경받는 장로중의 한명이 투표로 선출되는 자리입니다. 이 말을 유대 종교 안에서 야이로는 꽤 덕망있는 유대종교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야이로를 예수님 앞에 엎드리게 한 것은 자신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딸이 죽게 된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야이로는 “예수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야이로가 회당장이라고 분명히 밝힌 이유는, 유대종교의 전통과 관습보다도 고난 앞에서는 어느 누구나 간절함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간절함에 예수님이 동행합니다. 이 이야기는 당연히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는 것으로 끝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이야기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무리와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예수님이 누군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대어서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시고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몰려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을까 물으십니까? 라며 예수님의 옷자락을 누군가가 손을 대는 것은 당연한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적이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기적에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은 어떤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기적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은 혈루병을 열두해 동안 앓은 여인이었습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이라는 표현에는 이미 두가지 약점에 드러나 있습니다. 여인이었고, 혈루병을 앓았다는 것은 이 여인의 삶 자체가 늘 고통과 고난으로 얼룩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여인으로 사는 것도 힘든 시대였고, 거기에 피가 멈추치 않는 하혈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이 여인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유대종교안에서는 피를 흘리는 여인은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을 근거로 부정하다고 취급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지금까지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나 장로 직분을 주는 것을 성경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강대상에 여자가 올라가는 것을 금하는 교리를 가진 교단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레위기가 기록된 시간은 기원전 13세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기록된 내용을 지금까지도 지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문화적 수준, 혹은 사회적 배경은 이런 제도가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도 보면 예수님의 복음은 단지 레위기에 율법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다 더 큰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누고 있습니다.
혈루병 앓던 여인에 대해 마가복음 기자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의사에게도 보였지만, 차도가 없었고, 고생도 많이 했으며, 재산도 다 탕진한 상태였습니다. 말그대로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치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그 옷자락을 만지기만해도 내 병을 낳을 텐데”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죽어가는 딸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야이로와, 소문으로 듣고 예수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겠다는 혈루병 앓던 여인은 그들이 부딪힌 고난의 무게는 비슷하지만, 그들이 지녀온 삶의 배경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엎드려서 자기의 고난을 호소할 수 있는 여유가 있던 반면에 혈루병 앓던 여인은 그 마저도 할 수 없어서 자기 스스로 마음 먹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숨어서 만져야겠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 여인이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였더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에게 갑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는 자에게 고난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고난이 삶에서 경험되어집니다. 그런데,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여기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혈루병 앓던 여인을 고치시면서 예수님은 “바로 혈루병 앓던 여인의 믿음이 자신의 병을 고쳤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잘것없고 주목받지 않던 삶을 사는 여인, 늘 부정하다는 소리를 듣던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곧 너 자신을 구원했다”라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 당시의 종교적 관성을 넘어서는 파격적인 선언이 혈루병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으면서 전해졌습니다. “기적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늘 크다
바로 이어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더이상 따님 일로 괴로워하지 말라는 위로는 전합니다. 곁에 계시던 예수님이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러고는 우리들이 잘아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 걸어라~!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자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게 하는 기적은 죽음의 권세를 넘어서는 분명히 하나님 만의 능력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에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미 딸이 죽은 소식에 야이로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 절망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믿음을 잃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합니다. 여기서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혈류병여인이 지닌 믿음과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미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고난을 받고 어려움에 빠지지만, 그것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음대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대하는 자세라는 뜻입니다. 야히로의 딸이 기적처럼 살아난 것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보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야히로의 딸의 병이 낳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데 가장 편안한 구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혈루병 앓던 여인이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이해하도록 이끌어갑니다. 우리의 믿음이 곧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은 늘 뻔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예상치 못하는 사건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열광하겠지만, 우리들이 본문을 통해 확인할 것은 예수님이 주문한 “두려워 말고 믿음을 가지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또한 혈루병 앓던 여인에게 말씀하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에 주목해야합니다.
믿는자가 다르다는 것은
예전에,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입국하면서 학교에서 제 I-20를 잘못 다루는 바램에 공항에서 두시간동안에 발이 묶인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목사님이 라이드를 나오기로 하셨는데, 마음은 조바심 나지, 혹시 잘못돼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지,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두시간이 지나고 학교에 전화해서 제가 학생인 것이 증명되니까 짐 찾는 곳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붙인 짐을 찾기 위해 서둘러 항공사 카운터로 갔더니, 컨베어밸트가 끊어져서 짐이 나오질 않아서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10분 정도 지나니까, 컨베어밸트가 수리되어서 제 짐이 딱 하니 밸트에 올라왔습니다. 함께 비행한 다른 승객들은 두시간을 공항 바닥에 앉아서 기다리고는 간신히 짐을 찾았는데 저와 가족들은 입국심사장에서 두시간 동안 편안한 의자에 에어컨 잘나오는 곳에서 쉬다가 나왔으니 불행이 참 다행으로 느껴졌습니다. 자 그러면, 저에게 이 사건은 행운이었을까요? 불행이었을까요? 제가 만약 이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이야기했다고 생각해보면, 두시간을 공항바닥에서 기다린 사람들은 그리고 짐을 찾지 못해 다른 비행기를 타지 못한 분들은 고난에 휩싸인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까요?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구덩이 빠졌습니다. 다행이 나뭇가지에 매달렸는데 아래를 보니까 독사가 우글거리고, 위를 올려다보니, 사자가 으르렁 거리고 있습니다. 마침 나뭇가지에 꿀이 가득 담긴 꽃이 피어서 꿀을 먹으며 기운을 차리고 어떻 살아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쥐가 이 나뭇가지를 갉아내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것을 우리들의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너무 극단적이고 그럴까 싶은데, 우리들이 살아내는 모든 삶의 모양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은 다르다고 합니다. 무엇이 다르냐, 다른 사람이 받는 고난을 받지 않아서 다른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것이 만사형통해서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르다는 것은 혈루병 앓던 여인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나을 수 있을텐데 라는 고백으로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일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세상은 모두가 부정하다고 이야기하고 관계하지 않는 이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처럼, 지금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 어쩌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곳에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다릅니다. 또한 딸을 잃은 야히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이어가는 삶을 사는 것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기적에 관심을 갖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을 찾듯이 사람에 더 관심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믿는자로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꿈꾸는 존재: 이것이 다르다
예수님의 기적 사건에 몰려든 무리 사이로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 “믿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믿음의 열매는 무모 하지만, 자신의 처한 상황, 처지나 신분보다도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에 우리들은 또한 주목해야합니다. 관성처럼 살아가는 삶에 예수님은 거꾸로 생각하고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믿음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들은 자신있게, 세상이 밀고 가는 관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그 너머에서 일어날 일들을 꿈꾸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들이 꿈꾸는 신앙공동체, 교회를 세워 나가고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밀려드는 고난 스러움에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단단하게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우리는 갖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아파합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아픕니다. 아파트가 무너진다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도 우리들은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든든히 지켜냄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아파하고 울어대는 것이 지금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또한 긴 시간 코로나바이러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삶에 막막한 이들을 향해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 무엇이 다른 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삶은 역설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 같습니다. 이 삶을 위해 헌신하시는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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