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0편-41편, 5월19일 목요일



"몹쓸 병마가 그를 사로잡았구나. 그가 병들어 누웠으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하고 수군댑니다.내가 믿는 나의 소꿉동무, 나와 한 상에서 밥을 먹던 친구조차도, 내게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시편 41편:8-9)

고난과 탄식이 가득시 이 두편의 시에서 고난이 삶에서 떠나지 않음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으로 탄식 또한 떠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가깝던 친구가 오히려 원수가 되는 이야기는 사실 경험하기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동의가 가능한 이야기들입니다. 가까운데 더이사 가깝지 않은,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리려고 준비했다는 친구였던 대적자에게 시편기자는 다시 갚아 줄것을 간구합니다.


이런 복잡한 삶의 구조속에서 우리들이 기대하는 한줄기 은혜는 간간히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때 주님께서 그를 구해주신다.”(시41:1) 고백인데, 이는 이 복잡한 삶의 구조속에서도 진실되 삶의 모습은 가난한자와 힘없는 자를 돌보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임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 내용은 반복적입니다. 오늘날 이런 본문을 읽어내는 우리들에게 오늘날 가난한자, 힘없는 자가 누구일까?를 반복적으로 묻게 하는데, 예수님은 가난의 폭을 마음이 가난한자까지 넓혔고, 힘없는 자는 상대적인 것이니 그 범위가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고백은 늘 살아가는 삶에서 내가 가난한자 힘없는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부딪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범주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해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들의 친구도 이 범주에 들어가 혹은 내가 이 친구들로 부터 이런 마음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인식이 있다면, 친구가 원수 되는 따위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친구가 몰던 차를 잘 알고 지내던 친구가 차를 자신에게 팔 것을 제안했습니다. 생각한 가격보다 낮은 가격을 부르는 바람에 거래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거래만 성사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차를 사려는 친구에 대한 묘한 얄미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큰 액수의 차이도 아닌데, 사람의 마음이 비슷할 것입니다.


오지랖을 부려서 제가 차를 사려는 친구의 상황을 이해해 보자고 제안을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런 오지랖은 부리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가 상황이 어려운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대하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가난한자, 힘없는자를 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도움을 주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나누고, 어떻게 그들과 동행할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고난과 탄식이 가득한 시에, 시편기자는 그 복잡한 삶의 구조속에서도 늘 나눔과 동행이 멈추치 말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묵상

어떤 나눔과 동행으로 세상을 살려고 노력하시나요?


중보기도

  1. 장명숙 집사님이 어제 수술을 잘 받으셨습니다. 기도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주셨고, 컨디션이 좋아서 일찍 퇴원하셨습니다.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2. 하와이에 파트너 교회인, 아름다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3. 여름 사역을 준비하는 유스와 교회학교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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