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편-44편, 5월20일 금요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편42:5)


저희교회 새번역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번역본이고 문장이 요즘사용하는 말로 번역을 했으니 필요한 변화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어 성경에 비해 영어성경번역본은 다양합니다. 특히 한어성경 번역은 보수적인 입장이다보니, 새번역성경 번역은 꽤 오래걸렸습니다. 이전에 개혁한글 성경은 영어성경을 번역했다면, 새번역은 원어성경을 번역했으니 본문의 의미가 더 정확하게 와 닿을 수 있다는게 성서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개혁한글에 번역된 소경이나 앉은뱅이등 요즘은 사용해서는 안되는 단어들도 눈이 보이지 않는자, 걷지 못하는자로 번역을 했으니 시대적인 이해도 잘 반영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성경의 맛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떤분은 새번역 성경이 예의가 없는 성경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이말이 무슨 의미인가? 보면, 개혁한글에서 읽혀지는 “가라사대”라는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말투때문에 그런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시편을 읽을때 그 맛이 그리울때가 있습니다. 특히 시편 42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를 새번역은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아마 원어성경의 뜻은 마른 시냇물 바닥에서 그럼에도 물을 찾아 헤메이는 목마른 사슴의 모습을 잘 번역한것 같은데, 헤메이듯이를 헐떡이듯이로 번역하니, 이전에 알고 있던 시의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어 시를 다른 말로 번역하는일, 다른 언어의 시를 한어로 번역하는 일은 아무래도 또다른 시적 창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편 42편은 어릴때 부터 좋아했던 시편입니다. 노래도 즐겨 불렀고, 기타를 처음 배운 이후에 친구들 앞에서 불렀던 찬양도 이 찬양이었습니다.


요즘 청년들과 지내면서 벽처럼 느껴지는게 있습니다. 아마 이런 번역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시대적 간극이 있다보니 현상을 보고 해석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아마 내가 모르는 말로 이들은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을 저는 여전히 예전의 눈으로 보려고 해서 생긴 벽이 아닐까? 흔히 꼰대가 이렇게 생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 언어 이 모든 것들이 시대를 지내면 변화됩니다. 우연히 예전 80년대, 90년대 뉴스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그 어색함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은 낯설음이라는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시편 42편, 번역의 문제, 혹은 이해의 문제를 논하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을 읽을때, 처음 하나님을 찬양했던 그 마음은 여전히 이 고백에서 발견하게 되니, 겉으로 느껴지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백과 의미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익숙한줄 알았던 것을 어색함으로 경험할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익숙하고 어색함은 겉모양일뿐 그 알맹이는 여전합니다.


묵상

어떤 소망을 품고 오늘 하루를 보내실 것 같으세요?


중보기도

  1. 교회학교, 중고등부,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특별히 졸업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2. 열린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3. 3강단교환주일을 통해 개척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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