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승리를 즐거워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고 늘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시편70:4)
우리들이 경험하는 세상은 다윗이 경험하는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고, 나의 원수를 심판하실것이라는 기대는 보편적인 기대로 늘 우리의 기대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나를 혼내시고, 상대를 축복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런 뻔한 감정을 노래로 담아 불러내는 것 처럼 보입니다. 원수들을 물리치고, 자신에게는 승리를 달라는 이 간편한 감정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는 고백이 여기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함은 사실 현실적으로는 막막한 가운데서 고백되어진것입니다. 현실은 원수가 승승장구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은 절박합니다. 원망과 탄식이 흘러나올 만 한데, 여기서 기대와 소망이 멈추질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조건 긍정적인 초긍정 마인드로 살아가야 할까? 언제든지 감사,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니 나는 승리할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속에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오래된 질문입니다. 고통받는 그리스도인은 무엇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인가? 기독교신앙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믿는 종교일까? 아니면 고통을 다르게 이해하는 종교일까?
삶에 고난이 없다는 것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아낸다는 속성에는 고난 기쁨 탄식 슬픔, 위로등 다양한 감정들이 동반되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무게를 두고 사느냐? 현실의 고난에 앞으로 펼쳐질 다른 삶도 고난이 집어 삼키느냐? 아니면 현실을 넘어선 기대로 삶을 드라이브 하려고 노력하느냐? 비슷한 현실에 삶의 방향은 다릅니다.
지금 시편 노래가 그렇습니다. 막막한 현실에, 앞으로의 삶은 하나님의 철저한 개입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물리치고, 자신에게는 위로를 주실 주님의 개입을 기대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난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노래에서 배우는 건 바로 이런것입니다.
묵상
현실도피와 현실 기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중보기도
11월17일 입당감사예배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11월17일 주일 낮예배와 오후 4시예배 이렇게 두번 예배가 있어요)
오클랜드 캠퍼스 매각이 잘 진행되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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