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화기가 고장이나서 (충전이 되질 않아요) 처음으로 전화기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새 전화기를 주문했는데, 프로모션이 너무 좋아서 얼릉 구입을 했더니 백오더가 진행되서 10월 말에나 온다고 합니다. 좋은 프로모션은 다음부터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좋은 경험입니다. 다행이 카카오톡은 다른 기기에서 워킹을 하니 연락하는데 문제는 없겠지만, 혹 이런 저런 이유로 연락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약간 걱정은 되긴합니다.
예전에 전화기 없이 다니는 분들이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한적이 있는데, 불편보다는 어딘가에 메어있는 것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해야하나?! 뭐 그런 특별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워낙 오래 들고 다녔던 터라, 전화기의 부재의 공백이 크게 느껴지고 야간의 불안함이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급하면 카톡으로 혹은 아내에게 연락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지만, 핸드폰의 의존성이 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익숙한 것의 소중함은 부재에서 느껴집니다. 특히 사람의 부재는 우리들을 더욱 외롭게 몰고가거나, 관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경험을 하게됩니다. 특히 들어오고 나간 자리를 경험하는 교회공동체는 제법 정이 든 친구들이 자신의 다음 여정을 위해 새로운 곳으로 출발하는 모습은 정주면 뭐하나~! 하는 허탈함을 갖 할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시험거리는 하나님은 살아계신데,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특징은 이스라엘이 자주 부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모세의 부재를 채울 여호수아가 등장하지만, 너무 긴 시간 모세의 역할이 부재를 이제 곧 맞이할 이스라엘 공동체에 부담이 된것 같습니다. 모세의 설교는 도전적이고 자극적이며 꼼꼼하려는 의지가 보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렘법, 즉 진멸법은 전쟁으로 가나안 족속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요청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려내는데 굉장히 무서운 하나님으로 기억될만 합니다. 사실 진멸법은 고대근동의 모든 전쟁법입니다. 문화적 동화나 종교적 순결성을 지키려는 제법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만, 전쟁의 승리는 완전한 진멸로 증명되어진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 시절의 야만성을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한분이신데,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 맞는가? 대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시간과 공간 거기에 심리적 오류가 함께 섞여있어서 그렇습니다. 모세의 시대를 지금의 사고로 판단하는 것은 내 어릴적 어리광을 어른의 시점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큰 간극을 무시한 판단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재의 불안함을 극복하는 것이 큰 과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이런 부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져든 이유는 바알과 아세라는 신상이 존재하는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때부터 눈으로 보는 것에 집착한 인간의 한계는 결국 성숙한 신앙을 갖기에는 꽤 많은 노력과 시선의 확장이 필요한데, 아직 이스라엘은 이런 노력이 부족했던것 같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부재를 걱정하며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묵상
부재의 경험중 가장 기억의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중보기도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요즘 보이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찬양대와 찬양팀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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