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9장, 11월21일 월요일




이것이 엘르아살 제사장과 의 아들 여호수아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의 회막 문 곧 주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서 나눈 유산이다. 이와 같이 하여 땅 나누기를 모두 마쳤다. (여호수아 19:51)

오늘 아침에 차가 시동이 안걸리는 당혹스러움에 아침 묵상이 늦었습니다. 서둘러 손을 보고는 자리에 앉았는데, 아차~! 아침묵상, 마침 어떤분이 "무슨일 있으신가요?"라는 문자에 깜빡한걸 알았습니다. 당혹스러움에는 장사가 없는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잠깐 말씀드렸었는데, 대학원에서 구약을 전공하면서 성서지리에 관심을 갖고, 베냐민 지파의 영토변천연구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영토를 연구한다는게 무슨의미일까 싶었는데, 공부하다보니까, 낯선 지명을 이해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게되니까, 성경을 읽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논문의 방향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베냐민 지파의 역할, 남왕국과 북왕국의 분열이후의 역할등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때 느낌은 익숙치 않은 지명들을 알아가고 찾아내는데 과연 얼마나 성경을 이해하는데 이 지명들이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여호수아 19장에서 "땅 분배"의 완성을 알리는 내용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은 마침내 종료된 "가나안 정착"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간단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어내는 중요한 주제가 될것 같습니다. "땅"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삶의 자리가 아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한 약속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로 계산하게된 근거는 바로 "약속의 땅"에 대한 이해서 비롯된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곧 축복의 땅(물질)을 허락하는 명제를 세우게된 근거가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땅의 분배와 정착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책임으로의 초대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대로, "정복"의 개념은 무참히 가나안땅을 짓밟고 이겨낸 승리의 결과물로 가나안 정착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개념이 흐릿해지기 때문에 경계해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착을 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성과이지만, 가나안족속에게는 봉변과는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등장하는 엄청난 전장을 생각하신다면, 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를 이해하는데 부담이 될 수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쏘아올린 정복전쟁은 끊임없이 이스라엘땅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치열한 전투로 이어지고, 결국 남북으로 위협하는 강대국에 의해서 망하고 맙니다. 여기서 망했다는 의미는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간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흐름속에, 예언자들의 의식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 회개의 촉구 거기에 그럼에도 불구한 회복의 선언이고, 훨씬 후대로 갈수록,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회복이 선언되어집니다.


이런 예언자적 선포의 흐름은 실제적인 가나안땅에 대한 이해의 수정을 요구합니다. 승승장구하며 정착한 가나안땅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책임은 "정확한 예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대한 충분한 이해" 그리고 그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만약 땅을 빼앗기고, 멸망한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바로 이 모든 것들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지적하는게 맞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정착한 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의 성취이며, 그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에 걸맞는 책임을 그 땅에서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이해가 부족하다보니, 가끔 기독교인들이 무모한 무리수를 던질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복"을 하나님의 뜻으로 마치 가당치 않은 곳을 향해 오직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선언은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한동안 한국에서는 몇몇 목회자분들이 이런 입장에 있는 것 같습니다. 쏟아내는 말이 마치 여리고성을 정복하듯, 정치권을 흔들어대고, 나라전체를 좌주우지 할 수 있다는 판다지에 빠져 있는것 같습니다. 이런 외침은 점점 무시되어질것이고, 점점 기독교를 오해하는데 이용될것이고, 결국, 쏟아낸 말들을 주어담는 것은 상관없는 우리들의 책임이 될것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하는 것은 성직자의 바른 자세는 아닙니다만, 평화가 결여된 무자비한 비난과 수위를 넘는 발언들은 오히려 독이 되어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위협하게 될것입다.


묵상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일 없네라는 믿음의 자신감은 무모함을 위해 달려가는 것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말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면,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인분들의 뼈를 때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온전한 예언의 목소리입니다. 모인사람들의 달콤한 열광은 결국 모든 공동체를 위협할것입니다. 이런 자아도취적인 신앙은 결국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된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보기도

추수감사절 주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삶을 든든히 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매주 화요일은 장명숙 집사님이 항암치료를 받습니다. 새로운 신약으로 약을 바꿔서 진행합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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