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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0장, 11월22일 화요일



이 성읍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나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 누구든지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에, 그 곳으로 하여 회중 앞에 설 때까지,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의 에 죽지 않도록 하려고, 구별하여 지정한 도피성이다. (여호수아 20:9)

신명기서에서 한번 다룬 주제인 "도피성"이 실제로 땅을 분배하면서 정확한 지명과 위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이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한 공동체의 배려, 그리고 그 한계는 이방인을 (외국인)넘어서는 배려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마침내 땅을 받은 민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세운 이 도피성은 "사람이 우선"이라는 큰 명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죄보다 사람이 먼저다. 여기서 율법이 가진 기본적인 방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런 해석은 아마 여러 세대를 거쳐 논쟁거리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이런 비슷한 이슈들이 논쟁이되어 오는 것을 봐서는 쉽게 "도피성"의 존재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논의는 다양했을 것이고, 그들이 취한 삶의 태도에 따라, 마음대로 잣대를 들이 대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갈등의 원인은 각자가 취한 삶의 방향이 다른데서 비롯됩니다. 이것을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갈라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보속에 보수가 존재하고, 보수속에 진보가 존재하는 것을 볼때, 이런 진영논리는 쉽게 우리들이 처한 사고와 판단의 기준이 될수 없습니다.


아마 보수적(보편적인 구분이니 이해를 위해 그대로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인 입장에 있는 분들은 이 도피성을 끊임없이 인간을 속박하는 도구로 이해하고 해석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사람이 우선이 아닌 율법이 우선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반대로 파격적인 해석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율법을 주신것이니, 율법이 절대로 사람들의 삶을 속박할 수 없다는 해석을 주장할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서로를 갈등하게 했을 것이고, 힘이 강한 쪽인 약한 쪽을 속박함으로 마침내 하나의 주장을 만들어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를 생각해보면, 율법이 사람을 속박하는 쪽으로 해석의 기울기가 결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파격적인 또 한사람의 등장,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울었던 방향을 균형잡힌 사고와 판단으로 이끌어 갔을 것입니다. 상상해보면, 사람들은 열광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신선함에 마음을 두고 그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정황을 이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들의 삶의 방향도 잘 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신앙은 속박이 목적이 아닙니다. 자유가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자랑스럽게 수천년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을 존중하는 제도를 기록하고 오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지금 이 시대에 취할 삶의 자세는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통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혹시, 마음속에 편견과 자기 판단으로 속박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 마음을 부숴내서 더 넓은 마음, 인정과 화해와 평화의 마음으로 넓혀야 합니다.


묵상

적어도,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배우는 것은 우리들은 속박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의 해야할 일입니다.


중보기도

장명숙집사님이 오늘 11시에 항암치료가 있어요. 새로운 약으로 치료하시니 긴장하신것 같습니다. 기도해주세요. 한상은 목사님 가족장례예식이 오늘저녁에 있습니다. 평소 소박함으로 감동을 주셨었는데, 마지막까지 조용히 돌아가시는 목사님과 가족들을 위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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