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는 엘리야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선포하며 아합의 가문을 숙청합니다. 반란의 수괴라는 이름 보다는 각 성읍의 지도자들을 속여 이들도 아합가문을 진멸하는데 이용합니다. 예후는 아합의 가문, 즉 오므리 왕조를 철저히 제거하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제거함으로 종교개혁을 이루어 냅니다. 이 과정에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예후와 등장합니다. 정확하게 왜 레갑의 자손들이 예후의 쿠테타와 종교개혁에 동참했는지 나와있지 않지만, 예후는 여호나답이 자신의 종교개혁을 이루어내는데 함께 해줄것을 요청합니다.
예후의 병거에 앉아서 이스라엘 전체의 바알 선지자들을 모아놓고는 모두 척살합니다. 이를 예후는 엘리야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냉정하게 예후가 완벽한 종교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여호사밧이 저질렀던 베델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섬긴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봐서는 바알 선지자들 제거하고 신상들을 모두 태웠지만, 여전히 베델과 단에서 이루어진 우상은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 여호나답은 예후의 행위를 증거합니다. 예후의 이런 행위로 시리아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치러내려왔고, 이로인해 예후는 어려움에 빠집니다.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요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를 고집한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유다왕국에 있었기때문에, 성전과 법궵에 대한 부재가 이스라엘을 금송아지를 고집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을때, 모세를 기다리던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후가 모든 바알종교를 쓸어낸 것은 “나봇의 포도원 사건”으로 불거진, 이스라엘 율법이 정한 토지법과 바알종교가 지닌 토지법의 충돌이 예후의 개혁을 통해 다시 이스라엘 율법으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이 사건들 사이에 여호나답은 단순한 목격자 혹은 예후의 협력자가 아니라, 이후에 레갑 자손들로 이어지는 증거자로 성경에 자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율법으로 혹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재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예후는 엘리야의 예언은 실현된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의 부재 앞에서는 금송아지를 의지하는 인물로 기억됩니다. 오늘 말씀은 부재속에, 혹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일상속에서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바로설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묵상
하나님의 부재, 즉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음으로 믿음이 흔들린적이 있으신가요?
중보기도
박두진 권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새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중고등부 수련회를 위해서 깊이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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