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잡이
하나야라는 예언자가 등장했는데, 예레미야와는 전혀 다른 예언을 합니다. 예언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기대를 이야기합니다. 이 일로 하나냐는 죽임을 당합니다.
새길말씀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언자 하나냐에게 말하였다. “하나냐는 똑똑히 들으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예언자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도록 하였소. (렘 28:15)
묵상
우리가 만약 유다의 입장이라면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예언중에 어느 것이 귀에 들어올까요? 되도록이면 극단적인 고난을 피하는 내용이 아무래도 좋겠죠. 그런데 긍정적인 이야기와 무모한 이야기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냐는 무모한 이야기를 한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아마 현장에 있었다면, 하나냐의 예언이 더 힘있어 보였을지 모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오랫동안 들은 터라,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하나냐의 예언에 솔깃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냐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삶을 옳아메면 결국 그 부정성에 삶이 움켜쥐움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모함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냐의 판단은 바벨론이, 곧 느브갓네살이 망할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냐는 분명히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서는 분명히 느브갓네살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틈새에 하나냐는 절대로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당연히 유다의 원수이니 하나님이 친히 느브갓네살을 내리치실것이라고 선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냐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느브갓네살을 치려고 하시려면, 유다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전혀 변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유다에게 하나님의 이런 기적이 일어날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평등이라는 단어는 신앙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은혜받고 똑같이 구원받는게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떤 방향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내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막연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은 뻔뻔한 행위입니다.
기도
하나님, 늘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살게 하소서.
중보기도
박두진 권사님이 다음주에, 다시 항암치료를 이어가십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교회학교와 유스그룹, 청년들을 위해서
각속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곧 있을 미국 대선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시작하는 대면예배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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