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잡이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했습니다. 그때 애굽의 군대가 북상을 하자 바벨론이 포위를 풀고 물러납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역을 가다가, 베발론에게 항복하러 간다는 오해를 받고는 다시 감옥에 갖힙니다.
새길말씀
하루는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그에게 은밀히 물어 보았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 없습니까?” 그 때에 예레미야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바빌로니아 왕의 손아귀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렘 37:17)
묵상
역사에도 구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애굽과 북쪽 왕국 사이에 이스라엘은 늘 저울질을 하는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왕국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앗수르를 넘어선 바벨론이 득세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이 당대, 고대근동의 중심이었고, 세계 패권을 쥐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에 자리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을 점령해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제국의 확장을 위해 밀려 내려온 바벨론이 이스라엘과 부딪치고, 곧 점령직전에 애굽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원병을 보냅니다. 유다를 돕기 위해서 온것이라기 보다는 유다가 중간에서 충분히 완충역활을 해야 바벨론의 직접적인 위협을 견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원병을 보낸듯합니다.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수난을 통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큰 나라 큰 민족을 통해 일하시지 않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셔서, 우역곡절끝에 가나안땅에 정착시키시기까지 하나님이 그 일을 직접하셨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지 못했다는 것이 역사적인 고백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앞에 바로서지 못함을 분명하게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을 대조적으로 보면, 애굽은 바로서지 못하고 있는 유다를 이용하는 나라로서 끝까지 도움이 되질 않는 제국이고, 바벨론은 하나님이 사용하심으로 유다가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준엄한 역사적 현실 속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유다의 약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성전 이데올로기, 왕국 이데올로기 가운데 약자들은 소외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예언자들은 이런 소외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예언과 마음을 전하는 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과 심판은 회개를 촉구하고 이끌어가면서 동시에 약자들, 보통사람들에게는 마땅한 말씀으로 회복과 기대를 드러내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난스러움은 곧 당시에 가장 약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대변합니다. 신앙의 눈높이는 언제나 북족의 대제국도 아니고, 남쪽의 대제국도 아니라,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그 자리를 향해야 합니다. 그럴때, 비로소 회복과 희망으로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품고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들이 바라보는 것들이 높지 않고 가장 낮은 곳을 향하게 하소서.
중보기도
겨울이 다가오면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심각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속히 치료제와 백신이 만들어져서 질병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도록 기도해주세요.
박두진 권사님의 투병 가운데 하나님이 든든히 동행하도록 기도해주세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대면예배를 드리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해주세요.
모두가 건강하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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