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게되는 요한계시록의 본문들은 현대 기독교에서도 논란이 많이 되는 내용들을 유추하게 합니다. 봉인된 일곱두루마리에 대한 요한의 환상은 요엘서와 에녹서등 묵시문학으로 기록된 다른 예선서에서 모티브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활동은 지금 요한 처한 상황이 매우 궁지에 몰린 즉, 순교의 목전에 있는 교회와 교인들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야기의 전개는 점점 극적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으로 열리게되는 기대와 소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7장에서 등장하는 144,000의 숫자는 문자주의로 성경을 이해하는 분들에게는 극박함과 조바심 때로는 지나친 해석으로 그 안에 들어가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뽑아내게 합니다. 우선, 이 숫자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선택된다는 점에는 요한은 철저하게 유대공동체 기독교중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거나, 이 글을 읽는 대상이 이방인 보다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독자를 특정해서 나온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7장은 6장에 봉인된 두루마리와 연결되는데, 신비적으로 기록하는 내용들은 모두 요한이 본 환상을 구약에서 이미 전해진 내용들을 신약예언서답게 표현한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숫자, 그리고 마지막날의 현상들이 진짜냐 가짜냐에 대해서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만 해석하느냐, 아니면 성경에 나온 전반적인 내용과 용어들의 배경과 현상을 이해하며 해석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마, 성경공부나, 이런저런 종교서적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라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얼마나 어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지를 잘알고 있을 것입니다.
144,000에 대한 숫자는 구원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의미로, 박해와 순교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독려의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마침내 그날이 올테니, 온전히 잘 견디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문을 씻어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예언서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루실 그날을 소망하는 요한의 마음을 깊이 이애할 수 있습니다. 혹, 이 문장들을 우리들을 불안하게 하고, 당장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심취를 통해 이 숫자안에 들어야한다는 강박으로 우리를 몰고가는 분이 있다면, 바른 기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합니다.
예언의 목적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회복입니다.
묵상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여기서 말하는 숫자는 어떤 의미일까요?
중보기도
박두진 권사님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마지막 키모가 잘 진행되도록
교회학교, 중고등부,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에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평화가 속히 임하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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