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이사야 58:6)
부당한 결박, 멍에의 줄, 압제받는 사람 오늘 날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야합니다. 오늘 연회에서 아시안 혐오에 대한 연회차원의 성명서를 내기 위한 모임이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적 이슈가 무슨 관계일까?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하나님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생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26-29)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은 허버트 스펜서라는 영국의 철학자가 인간들의 사회적 생존경쟁의 원리를 함축시킨 사회적 철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후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적자생존의 개념은, 사회 철학적인 영역을 넘어서 과학적 개념으로 확장되어집니다. 생존을 위한 경쟁을 통해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것, 인류는 늘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왔다는 것. 이렇게 시작된 생존경쟁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능력과 힘을 통해 계급을 나누고, 학력과 성공이 비례하는 사회적 잣대를 자연스럽게 만든 것이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수 천년 전부터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시고, 비천하고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셔서 하나님이 손수 약한 자를 택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셨습니다. 적자생존이 합리적 이론으로 보이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은 그 반대로 진행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강한 자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약한 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묵상
약한자를 택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보기도
박두진 권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혐오와 차별이 사라지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열린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오늘의 실천
용서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 용서하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