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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원고, 3월26일 주일






로마서 8:6~11

성령에 속한 생각


1. 올해 사순절의 성서일과의 방향은 꽤 도전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어떤분이 저에게 작정하고 말씀을 전하는 거냐고 물어보시는 분이 있는데, 제가 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방향, 즉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볼 수 있도록 하는게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설교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의 내용이 저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면, 내 삶에서 실제로 본문이 날카로운 메스처럼 느껴질 때입니다.

3. 성경본문을 읽고 확인하는 그 본문의 방향을 확인하면, 제 삶을 볼때 매번 제가 당당하게 본문을 전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게 여러분들은 모르는 설교자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선배 목사님들과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비슷한 고민에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 고민의 끝은 스스로를 성숙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메스와 같은 말씀보다는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를 하는 것으로 변질될 때가 있다고 합니다.

5. 그러니 성경을 읽는 우리들의 삶의 방향은 “성숙을 위해 노력”하던지, 아니면 “그 이야기가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될텐데, 바라기는 머뭇하지 마시고, 그리고 피하지도 마시고 당당하게 말씀이 우리 모두에 가슴에 새겨져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 이번주 성서일과에서 제 1독서, 구약은 에스겔서 37장1절에서 14절 말씀입니다. 에스겔 예언자가 본 환상이 기록된 본문인데, 에스겔은 포로기가 거의 끝날 즈음에 활동했던 예언자 였습니다.

7. 우리는 에스겔의 예언 중에 “성전에서 물이 흘러 넘쳐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8. 죽음이 가득한 자리에 생명이 넘쳐나는 에스겔의 예언은 단순히 잃어버린 생명을 일으키는 것만 꿈꾸는게 아니라, 북왕국과 남왕국이 이제는 하나의 이스라엘로 회복되는 것을 환상가운데 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9. 본문의 방향은, 하나님이 일으키는 생명의 능력이라는 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지난 모든 아픔과 상처를 회복시키고 거기에 갈라지고 분열된 것 마저도 새롭게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가 되도록 세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10. 성서일과 3독서, 복음서는 요한복음 11:1-45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죽은 동생 나사로를 예수님께 살려 달라는 요청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이야기는 살아난 나사로의 기적이 주제인 듯 하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에고 에이미” 즉 예수가 누구인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무게를 두고 본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2. 복음서가 들려주는 예수님은 “부활이시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13. 죽었던 나사라고 살아난 것은 새로운 존재로서의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도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4. 이처럼 제1독서와 3독서가 향하는 방향은 하나님이 마련한 생명은 기존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기억하시고 오늘 읽은 본문 제 2독서 바울 서신 로마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15. 우선, 로마서 8장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해석은 “성령”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6.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육신의 속한 삶을 사는가?에 대해 바울은 구별하고 있고,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7. 로마서에서 바울의 고민은 “율법”없이 “죄”가 용서되어질 수 있는가? 라는 전통적인 유대교적 질문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 어찌보면, 로마교회에 이런 전통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인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도 율법을 우선하는 주장으로 로마교회를 꽤 혼란스럽게 했던 것 같습니다.

19. 여기서 말하는 혼란스럽다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20. 그러니, 지금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역사와 육신의 울타리에 있는 것을 구별하라는 의미는 “율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육신의 행위로 보는 것이고, 이런 행위는 곧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 그러니, 분명한 바울의 의도는 더이상 오래된 율법에 생명을 맡기지 말고, 새롭게 부여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삶을 드리라는 것에 있음을 우리는 우선 이 본문을 이해하는 기본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22. 바울은 6절에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는 명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23. 여기서 육신에 속한다는 것은 “본능적인 인간의 욕구”를 포함하는 삶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4. 율법이 갖는 속성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인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가?에 대한 구분으로 이어집니다.

25. 예수님 시대에 율법주의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장 큰 적대자가 된 이유는 이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표현을 마음껏 했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6.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이 스스로에게 있다고들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27. 마태복음 7장과 로마서 2장에 보면, 분열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정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28. 뭐 이런 현상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분열된 생각, 분열된 정치는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마음 껏 정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가장 할 수 있는 표현을 가지고 정죄, 비난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29. 그리고 요한1서 3장에도 보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처럼 율법이 가지는 속성 혹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삶의 방향이나 원칙들은 다른 사람을 서슴없이 정죄하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를 정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0. 그런데,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아니 끊임없이 다른 바울 서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정죄함이 사라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31. 정죄! 라는 말은 쉽게 이야기하면 비난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32. 성경은 우리들이 누군가를 늘 비난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비난할 준비도 언제나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3. 이것을 바울은 율법에 의존하는 삶에서 드러나는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육신에 의존하는 삶의 모양은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삶 혹은 비난 당하는 삶, 정죄하는 삶, 정죄 당하는 삶에 노출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34. 그래서 7절과 8절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복종할 수 없으며, 기쁘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5. 이 말은 우리들이 누군가를 정죄하는 마음, 아니면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이 존재한다면, 우리들은 스스로 육신에 속한 삶을 사는 사람이고,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36. 반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성령안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7. 9절은 간단하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곧 성령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8. 바울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함께하는 행위와 함께 동반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39. 즉, 예수님을 믿는 다는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과 똑같은 삶, 고난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의 삶으로 우리들의 삶이 함께 놓여진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40.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살리신 영이 그 안에 똑같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연결되어질 수 있습니다.

41. 이것이 바로,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저를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42.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회원권을 얻어서 멤버쉽을 얻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께서 사시고,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행하셨던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그대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43. 바울은 이와같은 내용을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들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44. 바울이 말하는 성령안에 거하는 삶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함께 계시며, 우리를 미래의 생명으로 이끌고 갈 현재적 사건으로 성령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45. 우리는 막연하게 성령 받는 것, 예수 믿는 것,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들이 함께 하는 이 자리에서 이 모든 것들이 경험 되어져야 합니다.

46. 육신에 거하는 것, 성령안에 거하는 것 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령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가 대신 하는 삶이 아니라, 바로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는자로서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되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화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카페예화)

47.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들이 뭐 거창하게 대단한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48. 그저, 지금 우리들의 일상에서 성령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49. 바울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사는 존재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기전까지는 우리들은 육신에 메여서 서로를 또는 나 자신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익숙했다면, 성령이 함께 동행하는 우리들은 더이상 정죄 받거나 비난 받을 존재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50. 그러니, 더이상 육신의 자리에서 머물지 마시고, 하나님이 마련한 성령의 역사에 저와 여러분들이 삶이 드려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1. 저도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갈등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난 받지 않을 존재인가? 그리고 내가 아는 저 사람은 이제 더이상 정죄함을 받지 않아도 되는가? 충분히 사람이 바뀌었는가?

52. 그런데, 이런 생각은 성령의 역사가운데 있는 자들이 하는 생각이 아니고, 여전히 육신의 율법의 잣대로 세상을 보려는 자들이 보는 눈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53. 우리는 모두 똑같이 예수님과 같은 삶과 일치된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존재로서 우리들이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4.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니 다른 것에 흔들리지 마시고, 지금 당장 성령과 일치된 삶을 꿈꾸고, 이 꿈을 통해 성숙한 공동체로서 열린교회를 함께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55. 주어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그러니 이제 더이상 주저하지 마시고,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56. 지금 이 자리에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성령이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57. 성령의 방식대로 삶을 결정하고, 판단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더욱 마음을 활짝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58. 그러면 우리들이 꿈꾸고 소망하는 열린교회 공동체를 이 지역에 든든히 세워게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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