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장13절-35절
예수를 알아보았다
1. 오늘 읽은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트리니티 성경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이미 잘 아시겠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내진 글로 같은 저자가 쓴 한권의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2. 이렇게 생각해보면, 대충 누가복음의 저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후에 부활사건 이후에 그리고 제자들이 성령 받은 부활신앙을 고백한 이후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바울이 된 이후에 이방 땅에 교회를 세우고 박해 받던 시간을 넘어서 누가복음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누가복음 저자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진심을 담아서 기독교가 절대로 해로운 종교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 즉 유대인들이 아닌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 특별한 내용들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가복음을 읽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특별하게 읽혀지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누가복음의 가장 큰 관심은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은혜”로 사는 삶은 어떤 삶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5. 누가복음 저자는 간단하게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대 전제를 완성하며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 컸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6.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중에 “에메이징 그레이스”,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보통 죄를 회개하기 위해 불려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격을 노래한 찬양입니다.
7. 존뉴턴이라는 성공회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전 “노예선 선장”이었던 것을 회개하면서 “자기 같은 죄인도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며 작곡한 찬송가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8.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이고, 우리들은 그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 곧 신앙 고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9. 이 말은 누가복음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은혜는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그 은혜를 간직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받은 은혜를 잘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성경의 비유대로라면, 받은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고는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은 시간이 제법 흐른, 초대교회에 어떻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하고, 어떤 노력을 통해 신앙이 든든히 세워져가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12.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3. 알려지지 않은 두제자, 그 중에 한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고 기록된 것 이외에는 알려진게 없는 이 두제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자신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4.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들은 상당히 낙심했고, 실망한 마음으로 가지고 고향으로 낙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 이런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여기서 우리들은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인데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을까?
17. 16절에보면,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두 제자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이 두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 그러면 누가복음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19. 본문은 내용은 자연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두제자와 동행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이끌어 갑니다.
20. 17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18절에 이 두제자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1. 예수님의 의도된 질문에 이 두제자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감정이 들어난 것 같습니다.
22.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 두제자의 마음은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머물러 있었던것 같습니다.
23.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인 19절에서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듣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예수님 사건이 어떤 이야기인지를 이야기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24. 이 두 제자가 고백한 예수님은 첫번째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힘있는 예언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21절에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에게 소망을 걸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5. 엠마오가는 길로 가던 두제자가 침통했던 이유, 낙심하고 절망한 이유는 자신들이 소망을 걸었던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6. 저는 이들이 소망을 건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함께 연결되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27.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두 제자가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었고, 자기들이 세운 방향에 예수님을 포지셔닝을 하고 있었는데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혼란함.
28. 다르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의 목적에 세워 두고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며 살아왔는데,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렸다는 아쉬움으로 진정으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이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을 잊어버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알아 본 것일 수 있습니다.
29. 이 말은 내 목적이 신앙의 목적을 둔자들에게는 “주님을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30.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목적과 내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31. 만약에 내 기대와 내 목적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들은 진정한 부활의 신앙, 즉 부활하시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32. 주님이 늘 동행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다면, 지금 내 삶의 목적과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할 것입니다.
33.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교회는 로마의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박해로 인해 교회의 어려움도 있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어려움들이었습니다.
34. 사람들끼리 관계가 안 좋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수준의 이야기들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고,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해하며, 교회는 점점 자기 중심적 목적을 세운 자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35. 신앙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우리들의 목적과 방향은 “은혜 공동체”라는 정의를 벗어나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이미 은혜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36. 이런 노력은 예배를 통해 모임을 통해 기도와 찬양을 통해, 또한 성도간의 교재를 통해 지속되어지는 것이지, 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야 은혜가 보존되는게 아닙니다.
37.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그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고 합니다.
38. 우리는 이것을 교만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을텐데, 당시 누가복음을 기록할 당시의 교회도 이와 비슷한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에 있었습니다.
39.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에 대해서 바르지 않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선포된 복음,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분명히 이방인들도 똑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교회안에서 성도들 간에 이 문제로 갈등을 일으킵니다.
40. 이방인들이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부터, 그렇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예수님이 이미 선포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자기들이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정의하게 되니 결국 은혜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41. 오늘 본문에서도, 이 두제자가 자신들이 설정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거기에 소망을 걸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전체를 자신들의 목적에 한정지은 것입니다.
42. 그러니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43. 오늘 읽을 본문의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이 두 제자가 이야기를 하다가 날이 어두워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들어서는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4. 본문에 등장하는 떡을 떼는 행위는 분명히 성찬식을 상징하는 문장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45. 예수님이 떡을 떼어 나누는 순간에 이 두제자의 눈이 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알아보았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46. 예수님을 떡을 축사하시고, 떼어 나눈 이야기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나눔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47. 우리들이 성찬식때 빵을 떼고 함께 나누어 먹는 다는 것은 하나의 의식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밥을 나누며 예수님을 기억하는 행위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48.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는 밥상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9.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는 밥상을 잘 나눌때, 비로소 눈이 떠져서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0.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밥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밥을 나누는 의미는 매우 신앙적이고 은혜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51. 밥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밥을 나눔으로 우리가 한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할때 눈이 떠지고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셨다는 사실을 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2. 미국에 가족이라고는 저와 처 그리고 아이들 밖에 없습니다. 고향 떠나 이민온 분들이 거의 비슷할텐데, 저는 이런 상황속에서 가족도 그립고, 오랫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이 그립기도 합니다.
53. 그런데, 요즘에 드는 생각은 멀리 외국에 살면서 매주 마주하는 여러분들이 가족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54. 어쩌면 다른 가족 친척 친구보다도 매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밥을 먹으니 교회식구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또 다른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5. 지난주에 장명숙 집사님 아이들과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 아이들은 자기들이 꿈꾸는 일을 위해 이사 준비도 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었습니다.
56. 밥을 먹으면서 나눈 이야기는 어려울때 목사님한테 연락하면 제가 도와주겠다고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57. 문득 뭐 특별하게 가진것도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불쑥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설명하기를 “목사님은 돈은 없지만, 관계가 있단다. 그러니 너희들이 필요한것이 있으면 목사님한테 꼭! 연락하렴”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제서야 뭔가를 부탁할 마음이 생긴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5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저의 가족입니다. 그것도 가까운 가족입니다. 제가 어려움에 빠지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연락을 할것입니다. 그리고 머뭇하지 않고 도와달라고 이야기할것입니다.
59. 우리들은 생각보다 더 가까운 가족같이 엮어진 교회공동체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지금보다도 더욱 가족같이 이해하며 함께 서로 사랑하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60. 우리는 세상 다르게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받은 은혜 잘 보존하려면, 우리들이 목적으로 교회를 예수를 하나님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예수님이 기대하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어떻게 교회를 세워가실지 기대하며 순종하며 따라갈 때 우리는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될 줄 믿습니다.
61. 그리고 쉬지 않고 떡을 떼며, 밥상을 나눌 때, 우리들은 비로소 눈이 떠져서 예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고백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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