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재판하도록 하게. 큰 사건은 모두 자네에게 가져 오게 하고, 작은 사건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하도록 하게. 이렇게 그들이 자네와 짐을 나누어 지면, 자네의 일이 훨씬 가벼워질 걸세. (출 18:22)
물이 없다고 떼스는 이스라엘과, 출애굽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대조적으로 읽혀집니다.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불만족 스러운 것을 모세에게 드러냅니다. 이를 하나님께 아뢰는 모세는 죽을 힘을 다해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베푸신 기적과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행위는이렇습니다.
반면에 이드로는 멀리서 모세가 한 일,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신 은혜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이드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세를 인정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으면서 생긴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인듯합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이방인입니다. 본격적으로 출애굽한 이후에 이방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모세가 도망쳐 살았던 곳까지 왔습니다. 아내와 장인 그리고 처남들이 모세를 맞이하는데 이들 또한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방인임에도 정확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합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상대적인 고백을 다룹니다. 이스라엘은 늘 불평하고 (눈으로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이방인들은 들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재판 문제를 모두 모세에게 부탁을 하는 것을 보고 장인이 이러다가 모세가 쓰러지겠다는 걱정을 하고는 십부장, 백부자, 천부장 제도를 제안합니다. 소위 리더쉽을 나누고 시스템을 만들것을 제안을 한 것입니다.
여러모로, 모세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인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후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은 예상치 못한 이방인들의 행위와 고백을 통해 출애굽을 이끄신 하나님을 명확하게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묵상
이스라엘과 이방인 이드로와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중보기도
1. 장명숙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든든히 치료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손길로 치유되도록 기도해주세요.
2. 교회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아이들이 신앙안에서 잘 자라도록
3.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사역을 이끌고, 꿈꾸고 소망하는 일들이 잘 세워지도록
작은실천
웃으면서 환하게 인사하기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주님께서 말씀하신다.“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이사야 1:17-18)
중학교때 학교에 가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먼길을 돌아가는 방법과 철길을 무단으로 횡단해서 가깝게 가는 길이었습니다. 중학생때 로망(?!)인 회수권을 구입하고 버스를 타고 학교가는 것을 기대했던 저는 일부러 먼길을 버스를 타고 걸어서 등교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쯤 아마 철길을 무단으로 건너던 학생들이 빈번하게 사고를 당하는 것이 큰 사회 문제가 되면서 철길을 넘어가는 육교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는 버스를 타는 로망보다는 실용적인 빠른 길을 택하고는 육교를 선택했습니다. 역시 꿈꾸던 것 보다는 현실적인 편리함이 앞선다는 것을 그때 부터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등하교의 문제는 학교 옆에 붙어있는 대학교에서 일어나는 빈번한 데모가 문제였습니다. 봄부터 시작되는 데모는 여름이 오기까지 최루가스를 뿜어내고, 그 치열한 데모현장을 빗겨서 집에 가기 위해서 꽤 모험(?!)을 해야하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아마 머릿속에 내가 만약 대학생이 되면 이런 비슷한 현장에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고민스럽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막상 대학을 다닐때쯤, “캠퍼스의 봄”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더이상 캠퍼스는 데모를 하기 위한 곳이 아닌 취업을 위한 치열한 학업에 몰두하는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학교가 학교 다워졌다는 것이 맞는 것인지, 학문적인 것보다는 취업에 열을내는 것에 학교라는 본질이 더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 맞는건지 모르게 현장은 빠르게 변했습니다. 마치 정의와 공정의 시대가 갑자기 온것 처럼 젊은이들이 시위현장이 아닌 학업과 취업에 몰두해야하는 또다른 치열함에 빠져들었습니다. 학교만 바뀐 것이 아니라, 교회도 바뀌었습니다. 성숙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던 교회가 갑자기 성장에 관심을 갖고는 성장만 몰입하는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어디에 방향을 두어야 할지 어리둥절한 시간을 보냈던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의와 공정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는 순식간이었지만,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안에서 정의와 공정은 뼈아픈 주제로 여겨집니다. 여전히 우리들은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지 공정한지를 질문하고, 교회도 이 문제에 자신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정의와 공정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할 예언자적인 주제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이 문제에 자신없는 현실에 우리를 냉정하게 돌아봐야할 과제가 우리안에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묵상
지금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정의와 공정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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