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시내산에 오릅니다. 산에 마련된 경계는 성전에서 마련될 지성소의 경계의 모델이 됩니다. 하나님이 경계를 두고 오를자와 못오를자를 구별한 것은 당시에 모세가 지닌 역할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을 가지 못하지만, 모세는 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내려서 백성들에게 전하는 중재자의 역할에 무게를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이후에 모세의 역할을 제사장의 모델이 됩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고 내려올때,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말씀을 선포합니다. 20장은 십계명에 대한 선포가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잘 정리된 꽤 고급진 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시에 법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법, 즉 신에게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사람과 사람이 지켜야 할 법을 통해 좀더 성숙한 관계에 대해 이스라엘은 고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받은 이 율법은 이후에 가장 중요한 율법적인 기준이 됩니다.
성전이 크게는 세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법궤가 있는 지성소는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갈 수 있고, 두번째 경계에는 제사장과 허락된 자, 나머지는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구별되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내산의 경계도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있습니다. 이 경계는 차별적인 경계가 아니라 역할적인 경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휘장이 찢어진것)것은 더 이상 중재자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인데, 당시에는 모세와 같은 중재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묵상
하나님을 직접 뵙고 있나요? 아니면 어떤 계기, 혹은 어떤 자극이 필요한가요?
중보기도
1. 장명숙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항암진행이 잘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2.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수요예배가 하나님께 잘 올려드리도록, 청년들이 은혜가운데 잘 모이도록
3. 소망회 회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작은실천
욕망(욕심)과 꿈 구별해서 노트해보기
안쓰는 전등 끄기
백성이 나를 두고 이르기를 “이제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자. 이 사람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어서 우리의 혀로 그를 헐뜯자.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무시하여 버리자” 합니다. 주님, 저의 호소를 들어주십시오. 원수들이 저를 두고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되는 겁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제 목숨을 노려서 함정을 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나서서 그들을 변호한 것,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진노하셨지만, 주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고 그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구한 것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렘 18:18-20)
베토벤의 아홉개의 교향곡중에 제 7번 가장조 Op.92는 가장 베토벤 답지 않은 곡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격동기의 시대를 보냈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열광하면서도 결국 그 혼란함을 틈타 영웅에서 왕으로 돌아온 것에 실망하면서 베토벤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입니다. 교향곡 7번은 마지막으로 반 프랑스 동맹군이 나폴레옹1세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결국 그토록 원했던 남은자들이 승리하는 경험을 곡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교향곡 제7번은 가장 많은 경제적 이익을 주는 공연으로 이어졌지만, 사람들이 베토벤이 물질주의에 굴복함으로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잃어버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더이상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은자들이 더 영웅답다는 것을 베토벤이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흔히 시대의 격동기에 영웅, 혹은 난세의 영웅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영웅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평범한 자들이 그 영웅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가장 미약한 예언자였습니다. 힘이 없고 인기도 없는 늘 당하는 존재로서 예레미야는 그려집니다. 이런 예레미야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고는 믿는 구석이 없는 자였음을 본문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레미야가 바로 남은자였습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끝까지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 남아있던 예언자.
우크라이나 전쟁이 깊어지면 우려스러움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쟁은 결국 가장 연약한자들에 큰 피해를 주고 대량 살상무기가 사용되는 어려움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남아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승리한자를 영웅이라고 기억하지 않고 남아있는 가장 연약한 자들이 영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약한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묵상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드러나는 것에 열광하나요? 숨겨진것에 관심을 갖고 있나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