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의 덮개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을 세우는 기둥에 대한 설명이 오늘 본문에서 이어집니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이토록 자세하게 성막을 설계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성막이 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지성소를 나누는 기둥을 세우는 데 필요한 도구나 재료를 보면 정성이 엳보입니다.
광야에서 보낼 시간동안 성막은 이동식 성전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장막을 칠때마다 성막을 치고는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법궤를 지성소 안에 넣고는 광야생활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으로 여기고 혹 전쟁이 일어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출애굽의 1세대들은 이를 꼼꼼히 지켰고, 40년의 광야를 보내고는 가나안땅에 정착할때는 1.5세와 2세들이 성막을 이어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궁굼한것은 이런 정성과 달리 40년이 지나고 가나안땅에 땅을 분배받고 정착한 이후에 사사시대를 지내서 사울왕을 지나서 다윗때 성전을 설계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으니, 이 긴 시간 성막의 정성과는 달리 꽤 오랫동안 성막이 방치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성막 기둥 재료중 나무는 대부분 아카시아 나무를 사용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어릴적 아카시아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라는 인식이 강했었습니다. 물론 이후에 잘못된 정보였다고 하지만, 마땅한 나무가 아카시아 나무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어진 성막이 얼마나 오랜세월을 버티어냈을까?가 궁금하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성막을 관리하고 수리하는 일들이 있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이런 정성에 비해, 성막을 어떻게 유지하고 보수하고, 긴시간 건물이 아닌 다윗이 고백한것처럼 자신의 왕궁은 지어놓고 하나님의 집이 없다는 것에 찔려한 그 시간까지 성막에 대한 어떤 이야기와 상황들이 잘 기록되어있지 않으니 오늘 본문으로 너무 긴시간을 짐작하니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성막을 지어내는 정성과 달리 다른 관심이 궁금한 것은 처음 열정과 달리 그 이후의 삶이 궁금해지기 때문인듯합니다.
내 열정과 시간을 쏟은 시간을 보내고 훨씬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열정과 시간을 나는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지 돌아보게됩니다.
묵상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 열정과 시간은 무엇이고, 그 무엇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중보기도
1. 장명숙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항암치료후에 안정이 되어서 지속적으로 항암치료가 잘 진행되도록
2. 속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각 속회를 인도하는 속장님과 속회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3.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작은실천
싫은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 10:8-10)
집앞을 지나다 길가에 주차한 자동차 번호판이 없어진걸 발견했습니다. 경찰에 리포트하고 DMV에 새 번호판과 등록증을 신청했습니다. 한 두주가 지나서 도착한 번호판을 달기 위해 마땅한 너트를 찾아서 달고 있는데 옆집 부부가 인사를 건넵니다. 작년 7월부터 시작한 집 공사를 이제 마무리하고 내일 다시 이사를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긴시간 공사소음으로 불편했을텐데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넵니다. 작년 추수감사절이 되기전에 끝난다는 공사는 올해 4월이 거의 다되서 끝나는 겁니다. 펜데믹으로 물류가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고, 많은 사람들이 집수리를 하는 바램에, 뭐 이런저런 이유로 늦어졌으니 아마 이 예상치 못한 여정이 불편했던것 같습니다.
저나 그 집이나 각자 예상치 못한 상황을 이해하며 한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어디 삶이 마음대로 되던가? 하는 진리 아닌 진리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늘 계획된 된대로 일들이 진행되면 좋겠지만, 삶은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있어야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율법은 정해진 틀에 삶을 조정하는 기능이 강합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율법의 권위를 소유한 자들로 인해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한 여유와 이해가 부족해지고 말았습니다. 다양한 삶 복잡한 세상살이에 이런 여유와 이해가 없으니 종교적 행위가 차별과 정죄로 은혜의 본질을 흐트러뜨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화에서 “주님의 뜻”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은혜는 어쩌면 여유와 이해에 대한 영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뜻”은 여유와 이해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주님의 뜻입니다.
묵상
여유와 이해는 어떤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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