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입구에 늘 등이 밝혀져있습니다. 밝지도 않은 불빛을 24산 켜놓은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막을 세우는 일에 정성을 다하면서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 이유는 어둠을 밝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등불에 대한 이해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지 불을 밝히라는 의미이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뜻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으로 안내하는 길과 진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의 불빛, 곧 등잔이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묵상
등불을 발견하셨단요? 등불이 되기 위해 노력하시나요?
중보기도
1. 장명숙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2. 질병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3.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함께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4.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작은실천
한국과 미국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 18:35)
설교자로서 성경을 읽는 목사인 저는 본문에 있는 모와 순을 이해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마10:34),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4:12)가 읽혀지는 본문을 통해서 기독교는 충분히 배타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만, 레위기와 함께 신약성경에서 기록되고 있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7-18;마 19:19; 막12:31; 눅10:27)는 본문은 우리의 신앙을 보편성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외에도 성경에는 이런 긴장관계에 있는 본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나서와 룻기는 이방인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인들과 별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모든 민족을 넘어서는 우주적인 선포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유대중심적 신앙관이 뿌리깊은 율법주의는 모순적 성경읽기와 해석 그리고 삶의 적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읽기와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묵상으로 읽혀지는 마태복음 18장의 본문은 용서에 대한 최대값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과연 이런 용서가 가능할지, 혹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건지 정확한 읽기와 이해가 어려운데 이 문제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아마 이 문장이 모든 성경에 있는 모와 순을 이어주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방지축으로 규칙없이 이방인들과 그들의 문화에 빠져질낼때는 강력한 배타성이 강조되는 절대 신앙이 기록되었다면, 율법주의에 배타적 종교관이 뿌리깊게 내려짐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을때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런 간격을 이해하면 우리들은 좀더 성경이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초점을 맞출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묵상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