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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열린교회BKUMC

1월29일 주일 설교원고



Fra Angelico, The Sermon on the Mount, 1437-1445

마태복음 5:1-12

나를 따르는 자의 복


1.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익숙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다양한 이해들이 몰려오는 재미있는 본문입니다.

2.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양의 시험 후 예수님은 함께 사역할 제자들을 부르시고, 무리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후에 처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3. 우리들이 우선 오늘 본문을 나누기 전에 이해할 것은 마태복음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사역은 간단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셔서 몰려든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4. 그러면, 이 복음 기쁜 소식을 마태복음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마태복음 4:15-16절에 보면, “어둠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었다”는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어둠에 있는 자, 그리고 죽음의 땅에 있는자”에게 “빛”을 비춰주는 내용이었다는 것입니다.

6. 이 말은 삶의 절망에 앉은 자들에게, 빛으로 희망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이겠죠. 좀더 가깝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복음은 당장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모든 것이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과 “기대”와 “소망”을 주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우리들은 흔히,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에서 복음의 의미를 확인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복음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희망과 기쁨과 감격을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8. 이런 복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치는 챕터 1 내용”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9. 우선, 본문을 자세히 읽기전에, 이때에 부름 받은 제자들이 안드레, 시몬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하고, 그때 모여든 무리들이 이 말씀을 전하는 배경으로 이해해야합니다.

10. 이 말은 예수님의 가장 초기 사역으로 첫번째 사역의 모양이라는 것을 그리고 무리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들게 함으로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병고치는 기적이 사역의 중심이 아니라,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 특히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을 통해 몰려든 무리들에게 어떤 것이 복음인지를 가르키기 위한 장치를 우리들은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11. 우선, 산상 수훈 즉 산위에서 가르침의 첫번째 시작으로 팔복의 이야기를 오늘 나눌 텐데, 여기서 말하는 팔복의 의미 특히 “복”의 의미를 이해하고 본문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12.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복을 이해해는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배경은 “어둠에 있는 백성, 그늘 진 죽음의 땅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는 말씀”의 첫번째 시작이 이 “팔복”의 말씀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복”에 대해 개념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빛”과 연결된 것임을 우선 생각하고 본문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13.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복”은 한글로 번역할때 한자에서 따온 개념입니다.

14. 잘아시는 것처럼 한문에서 “복”은 “시”자와 “배가 빵빵하게 부른 복”이라는 상형문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15. “시”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하늘이 정한 것이 사람에게 내려지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하늘이 정한 뜻에 따라 빵빵해진다는 의미를 “복”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핀다르”라는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이 사용한 “마카르”에서 나온 말이 “마카리오스”라고 합니다. 원래의 뜻은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들로부터 자유한”이라는 시적 표현을 지니고 있습니다.

17. 한문이나, 헬라어나 비슷한 것은 “이런 복을 받는 것”은 전적인 신적인 관심과 배려 혹은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18. 특히 오늘 읽은 본문에서 등장하는 “복”은 “복이 있다”라는 한 문장으로 동사와 결합된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것은 “하나님이 마련한 질서에 참여할 때, 즉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때” 느끼는 기쁨을 “복이 있다”로 고백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9. 간단히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들이 이해 해야 할 복”은 어둠과 죽음의 자리에 있던 자들에게 “빛”이 찾아 온다는 “복음”의 핵심으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복이 있다”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 “이런 복이 있다”라는 개념을 이해하시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1. 3절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프토코스 프뉴마”라는 말로, 직역하면, “영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결핍된 사람, 물질적인 상실감에 빠져서 가난으로 인한 곤경에 지쳐버린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2. 사는 것이 만만치 않던 시절, 오랜 식민지와 차별로 멍든 자들에게 “영적인 충만”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3. 그들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등골이 휘는 사람들이며, 기본적인 생존 투쟁으로 인해 영혼이 짓밟힌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4. 예수님은 “천국 곧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 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에는 이런 버림 받은 자들의 자리는 어디에도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고, 분명히 이와 같은 이들이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5. 4절에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통곡하는 자들”즉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다양한 이유로 죽음을 빈번하게 경험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전에 죽음에 이르고, 전쟁과 기근, 감염병으로 수명이 단축되는 상황들, 거기에다 굶주림과 주거의 불안정의 이유로 죽음이 너무나도 삶의 가까이에 있었을 것입니다.

26. 죽음의 범위는 생명 뿐만 아니라, 지속될 줄 알았던 성전의 파괴와 빼앗긴 땅으로도 전이되었을 것입니다. 더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슬픔의 자리는 죽음과 주어진 현실에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슬픔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7. 여기서 말하는 “복”의 개념은 “위로”의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복음, 즉 빛의 또 다른 개념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28. 5절,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표현은 시편37편 11절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자”는 늘 형통해 보이는 “악인”들로 부터 학대 받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29. 인간사에서 가장 억울할 것 같은 상황에 놓인 자들, 말 그대로 어둠에 있는, 죽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30.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새로운 질서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형통하지만, 악한자들, 여전히 땅을 소유한 것 처럼 보이는 박해자들을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뒤집어 엎어 버리심으로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온유한 자”에게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31.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공평한 분배 정의”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어지는 말입니다.

32.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것은 로마의 불공정한 분배에 의해 최저 생계의 끝자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시작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의롭게 공정하게 분배되어 질 것이고, 이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3. 7절, “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자비를 실천하고, 자신의 것을 나누며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자비를 베푸는 쪽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34. 로마는 폭력에 의해 영역을 확장했고, 그 백성들이 식량 문제로 불안을 겪을 정도로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는 다르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힘은 무자비함으로 그들의 힘을 드러내지만,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환대를 받고, 자비를 경험함으로 풍족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35. 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은 참 모호한 표현처럼 느껴집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게 순수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어디에 순수해야 한다는 뜻인지 혹은 어떤 마음이 순수한지에 대한 복잡한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36.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깨끗한 마음”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때 여러가지 의지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목회자인 저도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지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현상만 유지 해야지 뭐 이런 마음으로 목회하는 목사는 없을 것입니다.

37. 물론, 성장과 부흥에 대한 질적이냐 양적이냐에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지만,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은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구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38. 다양한 마음이 있는 믿는 자는 즉 성도는 “이런 깨끗한 마음”이 가장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의지와 목적들이 있겠지만, 주님 앞에서는 다양한 의지와 목적을 내려놓고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믿음을 세워갈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39. 참으로 안타까운 분 중에 아무리 교회에서 헌신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깨끗한 마음에 집중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잘 알지”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40.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야~! 하나님을 직접 마주하는 친밀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1. 9절,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이 부분에 특별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로마는 자신들이 평화를 이룬다고 주장했었습니다. 팍스 로마는 전쟁과 정복으로 만들어진 강제된 평화였습니다. 이들이 말한 평화는 오직 지배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42. 그렇다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가 갈등이 없는 상태에서 성취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를 통해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하지만,그 누구에게도 억지로 제자가 되라고 강요하거나 강요 받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43. 로마는 위협과 폭력으로 백성들을 그들의 통치에 복종시켰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자발적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제국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통치를 시행하며, 이러한 온전함과 행복을 향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며, 만약 방해하거나 그것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에는 대항하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4. 마지막으로 10절, 11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세상의 가치관에 반대된다는 의미입니다.

45. 그런데 만약,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방해와 모욕, 박해 비난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모두가 원하는 방향에 서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46. 예수님의 팔복선언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처음 제자들에게 전하신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제자들을 안심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또는 그들이 고민하며 삶을 통쾌하게 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을 걱정하고 근심하게 하는 가르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47. 예수님은 복음이 곧 고통으로 어둠에 있는 자들, 죽음의 그늘에 머무른 자들이 “빛”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빛은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을 정하라는 말씀을 첫번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48. 이런 의미에서 팔복 말씀은 철저하게 당시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말씀입니다.

49. 로마의 기세는 여전했고, 그 기세에 유대종교는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바뀌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부분은 절망적이었고, 희망이 없고, 하나님의 구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50.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51. “아니다! 그들이 틀렸다! 너희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세상모두가 몰려가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다.” 이런 의미로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팔복의 말씀입니다.


52.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로마가 힘으로 통치했던 시기와 다른 가장 평화롭고 풍족한 시대에 삶을 뿌리 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팔복은 과연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는 삶의 자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53.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팔복 말씀이 철저한 현실적인 말씀이고, 반드시 삶으로 실천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들이 읽고 있는 마태복음 5장1절에서 12절 말씀은 여전히 우리들의 믿음의 삶으로 드러내야 할 “빛”의 모습임을 기억해야합니다.

54. 로마라는 제국은 지금 없지만, 로마와 비슷한 힘과 방향을 가진 존재들은 여전할 수 있습니다.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이런 존재들 앞에 교회는 똑같이 그들과 함께 비슷한 길로 접어들지 말고, 과연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어떤 실천을 통해 가능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 같습니다.

55. 분명한 것은, 세상이 모두 좋아라 하는 곳을 향해 우리들의 삶이 방향이 향하면 안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에너지가, 저와 여러분 각자각자의 삶의 목적처럼 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56.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의 질서를 세워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열린교회도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향해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거슬러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소망하며 꿈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57. 오늘 읽은 본문은 매우 실천적인 말씀이면서, 당장 우리들의 삶으로 드러내야 할 삶의 방향임을 기억하시고, 세상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질서가운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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