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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8일 주일설교 원고





의로움으로 살아가기

이사야 42:1-9 ; 마태복음 3:13-17


1. 지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한주 모였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 직접 예배당에 오신 분들도 계시고, 멀리서 운전하신 분, 그리고 줌으로도 많이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 야고보서 말씀을 읽었는데, 아마 오늘 본문 하고도 비슷하게 연결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3. 개인적으로 신앙의 여정은 꽤 복잡한 것 같습니다. 늘 저는 믿음은 단순하다. 예수를 믿고, 믿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야고보가 경험했던 초대교회나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는 교회나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것으로 봐서는 “변화”는 생각보다 어렵고, 믿음을 갖고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가지는 소망은 작년보다는 올해가, 그리고 내년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꿈꾸었으면 좋겠습니다.

5. 오늘은 주현절 후 첫주로 예배를 드립니다. 성탄절기를 보내고 주현 절기로 접어드는데, 주현절(Epiphany)은 다른 말로, 공현절, 신현대축일, 주님 세례 대 축일, 성삼위일체 대축일로 부릅니다.

6. 교회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갈라졌을 때, 서방교회는 보통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성탄당일에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경배한 것으로 가르쳐왔는데, 동방교회는 별을 보고 온 시간과 거리를 계산해서 성탄절을 지내고 13일째가 되는 날은 “Epiphany”로 즉 주현절로 정하고 동방박사들이 경배한 날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이 날을 기억하며 교회는 전통적으로 세례식을 거행하는 주일로 주현절후 첫주를 지키기도 합니다.

8. 지난번에 한번 말씀을 드렸는데, 절기를 지킨다는 의미는 “달력처럼, 시간을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 교회의 노력”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9. 어떤 분들은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이 개신교회와 맞지 않다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와 교회역사 더불어 신앙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10. 아마 성지순례를 가면, 왜 개신교회의 성지는 없냐고 묻는 분들도 계실 텐데, 개신교회의 시작은 불과 500년이 좀 넘은 역사밖에 안된다는 것을 기억 하셔야 하고, 그 전에는 하나의 교회였다는 것을, 굳이 따지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정도가 나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11.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주현절에 맞춘 본문이면서, 또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세례의 장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12. 오늘 특별히 두 본문을 읽은 이유는 성서일과에서 이 두본문이 구약과 신약성경을 대표하고 있고, 이사야서는 특별히 대림절기 때부터 읽어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세례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사야서와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에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13.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세례장면은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익숙하게 읽는 본문이지만, 사실, 이 장면은 초대교회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로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예수님의 세례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세례예식은 분명한 사실로 인정할 수 있지만, 두가지 이유로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14. 첫번째로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일까? 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태복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례하는 것을 주저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마 초대교회안에서 일어난 이런 논쟁의 결과로 약간의 각색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5. 두번째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가 없으신데 왜 “죄사함의 세례를 받았을까?”하는 질문입니다. 복음서에서는 분명히 세례를 “죄사함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런 질문은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16. 물론 이 두가지 질문은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러니까, 대충 껍데기만 인간이 아닌 정말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거룩한 낮아짐의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런 질문을 통해 본문을 뒤집어 보려고 시도한 독자들의 질문은 가볍게 볼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17.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방향은 15절에,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라는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세례는 인간 혹은 죄의 주제가 아닌 “의를 이루는 것”이 주제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8. 이사야 본문을 읽어보면, 이사야서도 비슷한 내용의 본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에서도 의를 이룬다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9. 이 “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쉽게는 “올바름” 혹은 “정의”라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고, 플라톤은 이 단어를 “균형과 조화”로 설명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함”으로 설명합니다.

20. 비슷한 뜻인 것 같은데, 제가 느끼기에는 여기서 말하는 “의롭다”는 것은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거창한 정의로운 행위를 위해 투쟁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즉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로서의 걸맞는 삶이 “의”로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 다시말해,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 하나의 구원의 공식처럼 우리들에게 익숙하게 머리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런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 즉 지치지 않고, 넘어져도, 상처를 받아도, 힘들어도 가는 길을 포기 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의롭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2. 오늘 읽은 이사야서는 제 2이사야의 작품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선포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몇주간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까지 망하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더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실 새로운 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3. 이정도면 지칠 만도 한데, 이 상황이면 포기할 만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24. 오늘 읽은 이사야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아있는 자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끌려간 자들이 보는 바벨론의 현실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자신들이 더 없이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25.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이사야가 선포합니다. 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미 상했고, 거의 꺼져가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꺾지 않고 끄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26. 4절에도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5절에는 생명을 주시고, 목숨을 주셔서, 마침내 6절에서 “의를 이루게 하셔서” 세상에 빛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27. 7절은 더 구체적입니다. 눈먼 사람은 눈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사람을 풀어준다고 합니다. 눈먼 사람이나, 감옥에 갇힌 사람이나, 영창에 갇힌 사람은 처지가 달라 보이지만,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28. 앞이 막막하고,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 같은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 본문에서만 선포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29. 나라가 망하기 전부터,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후에도, 그리고 다시 포로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도 선포되어졌습니다.

30. 그러면 이사야만 선포했을까? 이사야 이후의 다른 예언자들도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31. 여기서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왜? 언제까지? 그 끝은 언제쯤 올 것인가? 정말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복과 승리의 시간은 언제일까?


32. 오늘 읽은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장면이지만,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말씀이 읽혀지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 15절에,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두 의를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영이 내려와 들리는 음성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34. 이사야의 긴 인내와 지속적인 희망의 메시지의 결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35.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렇게 소망하던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입니다.

36. 그러면 하나님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의로움이” 예수님인가?

37. 이 의로움의 목적은 어떤 존재의 나타남이 아니라, 그 존재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인내의 삶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38. 낙심하고, 좌절할 순간에 이들을 향해 하나님이 이루실 의로움을 이야기하셨고, 그 기다림을 이룬 사람들이 마침내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9. 이런 의로움은 “사회정의 환경정의 경제정의 분배정의등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이 의로움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당장에 실천하기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내는 우리들이 당장 삶에서 경험하는 것을 통해 이뤄야하는 “의”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0. 우리가 소망하고 이루어야 할 “의”는 바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들고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41. 제가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연회는 동부연회입니다. 강원도 지역을 동부연회로 부르는데, 동부연회에서 춘천동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42. 아마, 목사 안수 교육을 받을때 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과정에 있던 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43. 강원도에 가면 속초와 강릉 사이에 양양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양양감리교회가 있는데, 하디 선교사가 개척한 역사적인 감리교회입니다.

44. 같은 동네에 양양 장로교회라고도 있습니다. 양양감리교회만큼은 아니지만 오래전에 시작한 교회입니다.

45. 어느날, 이 두 교회 권사님들 자녀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46. 서울에 결혼 식장을 잡아 놓고는 신부측과 신랑측이 각각 관광버스를 대절해 놓고, 새벽 6시에 출발해서 서울에 1시에 결혼 예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47. 결혼식 당일에 결혼식 시간이 다되었는데, 신부측 관광버스가 도착하질 않는 것입니다.

48. 그때는 전화도 없었으니,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49. 신부측 관광버스가 한계령길을 내려오다 브레이크가 파열되어서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는 절벽으로 추락하면서 2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50. 신부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신부의 다른 가족들이, 어린 조카를 포함해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51. 신부는 다리가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결혼식장이 울음바다로 바뀌었습니다.

52. 얼마나 슬픈 상황입니까? 생각만해도 말도 안돼는 상황이 현실로 경험되어진다고 하니까 당사자들은 얼마나 놀라고 슬펐을까..

53. 그런데, 신랑 될 사람이 목사님께 빨리 결혼식 주례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식을 마치고 사위로서 처가 댁 장례를 책임지고 맡겠다는 것입니다.

54. 아마 현장의 상황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겠지만, 사람들마다 이런 저런 다른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랑측 가족 중에서는 결혼이 능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신부측에서도 이 상황에 무슨 결혼이냐며 빨리 병원에 가자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55. 그런데, 신랑 될 청년은 단호하게 자신이 돌아가신 장인 장모의 사위가 되어서 모든 장례를 자신이 책임지고 치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56. 아마, 신랑은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 지금 주어진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그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판단하고 그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57. 저도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신랑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신랑의 믿음에 제 마음에 감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58. 주어진 현실은 비극적입니다. 절망적입니다. 희망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지어내라고 하면, 이렇게까지 지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프고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 청년 신랑은 비극과 절망이 자신의 삶을 움켜쥐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 길이 옳다고 하는 곳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간 것 같습니다.

59. 이후에 이 부부는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60. 이사야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준비한 새 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해하고 고백해야 할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삶을 가로막고 있는 다양한 고난과 어려움 낙심, 실패, 좌절에 굴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과 기쁨과 새로운 일을 소망하며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1. 이 소망의 열매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62. 여러분들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 낙심과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2023년에도 우리들은 또 다시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63. 우리들이 사역도 날마다 승승장구하지 못하고 어쩔 때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잘 인내하고 참아내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로움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64. 기억하시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준비하고 계획한 것들이 순조롭게 완벽하게 성취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할일은 생각만큼 더 힘들고, 고난이 더 길게 가고, 어려움이 떠나지 않아도,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는 우리들은 낙망 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65. 세상은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그만두라고 하고, 때려 치라고 하고, 누군가를 탓하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우리들은 “의를 이루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것입니다.

6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3년 함께 이 길을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인내하며 그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마련한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67. 이것을 기억하시고, 2023년 더욱 주님과 가까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눈으로 드러나는 시간을 보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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