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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열린교회BKUMC

1 월15일 주일설교 원고 _주현절 둘째주일




고린도전서 1:1-9

새로운 공동체


1. 오늘 본문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에 대부분은 지금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개념으로 생각하실 텐데, 당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야기한 교회는 두종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존재,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

2. 잘 아시겠지만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미하는 것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 죽은 교회로 표현하는 이유는 사람이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에 대한 평가라는 의미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3. 고린도전서는 충실하게 편지의 형식을 갖춘 성경입니다. 읽을 때 마다 한편의 편지를 읽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고린도전서를 잘 읽었다는 의미입니다.

4. 편지를 통해 사역을 한 바울의 노력은 뜻밖에도 오늘날 교회를 세워가는데 중요한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본문은 “교회 신학”으로서 “구원의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매 구절 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바울은 작정하고, 예수를 통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선언을 요청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여기에 잠깐 등장하는 소스데네는 고린도 지역에 유대교 회당의 회당장이었고, 사도행전에서는 로마 총독 갈리오의 묵인하에 회중들에게 붙잡힌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7. 소스데네가 회당장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초기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바울까지 아니지만, 바울과 비슷한 행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회심한 유대인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바울은 이 소스데네와 자신이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 하여지고, 성도라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대조적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9. 바울은 소스데네와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고, 고린도 교회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0. 바울은 분명하게 “사도”와 “성도”의 차이를 염두해두고 이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무게가 똑같다”라는 고백과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바울은 이 구분이 절대로 주어진 역할의 차이일 뿐,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입장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11. 사도는 “특사” 즉 어떤 일을 대신하기 위해 책임이 부여된 직책을 말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메신저나, 대리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 성도는 Hagioi(하기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된”에 무게를 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음으로 거룩하여 진다. 할때, 거룩하여지는 것을 “Hegiasmenois”(헤기아스 메노이스)라는 말로, “하기오이”에서 변형된 단어를 번역한 것이니, “그리스도안에 거룩하다”는 것은 곧 “성도”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13. 하나님의 부르심의 무게가 똑같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기인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로서 사도로 부름 받은 자는 사도의 역할을 하고, 성도로 부름 받은 자들은 성도의 역할을 합니다.

14. 바울은 특별히 “성도”를 복수로 사용합니다. 2절에 보면 또한, 이 성도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이라는 표현을 통해 모든 지역을 초월한 “그리스도를 예수로 고백하는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15. 하나님이 “성도”로 부르셨다는 것은 레위기 19:1-2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백성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의미를 가진 “성경”적인 언어입니다.

16. 그런데, 바울이 이 표현을 이방인이 주로 구성된 혼합 공동체에 적용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품어온 선민이라는 감수성에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17. 이런 언어의 변화, 즉 대상의 변화와 확장은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의 탄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8.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교회”는 옛 경계를 넘어서서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가져다 주는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19. 이런 공동체,즉 교회가 추구해야하는 목적은 3절에 바울이 이야기하는 “은혜와 평강”이 가득해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합니다.

20. 5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모든 일” 그 중에서도 언변과 지식이 풍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라는 지역의 특성상 무역을 위해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여 있던 고린도는 장사하는 자들의 입담과 다양한 나라와 문화를 통해 습득한 지식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21. 말과 지식이 풍족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다 보니까, 6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증거가 견고케 되었다”고 바울이 흡족해 하고 있습니다.


22. 제가 지난주에 잠깐 시애틀에 다녀왔습니다. 기회가 되어서 타코마에 있는 한 연합감리교회에서 새벽예배에 참석했는데, 제가 쓴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교회를 경험했습니다.

23. 목사이다 보니까, 저는 많은 교회를 경험합니다. 교단을 초월한 이런 경험의 여정은 거의 비슷한 분위기 흔히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트렌드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24. 그런데, 그 교회는 이런 트렌드가 없습니다. 제가 교회학교때 불렀던 찬양을 아직도 부르고, 목사님이 교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권위 오브 권위의 방식이니, 낯섬 오브 낯섬을 경험했습니다.

25. 만약에 제가 그 교회 분위기로 이 교회안에서 목회를 한다면, 반대로 제가 여기서 하는 대로 그 교회에서 사역을 한다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합니다.

26. 이 말은 교회마다 저마다 문화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맞는 사역의 방향이 있죠.

27. 아마 열린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잘 들어보지 못했지만, 아마, 교회마다 다른 문화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28. 그래서, 복음을 물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떤 그릇의 모양으로도 담겨 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9.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화를 충분히 이해했고, 그에 맞게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0. 그에 맞게 세워진 교회는 견고하다고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견고함에 대해 바울은 마지막 날까지 견고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31.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를 견고하게 할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본질 적인 질문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함께 고민해야할 내용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32. 아프리카 말로 “우분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서 온다”라는 뜻이라는 데, 넬슨 만델라가 이야기한 말로 유명해진 말입니다.

33. 이전에 이 우분투는 남아프리카 선교사로부터 알려졌습니다. 어느날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달리기 1등을 하면 한 가득 담긴 과일 바구니를 상품을 걸고 달리기 대회를 했다고 합니다. 출발 신호와 함께 서로 경쟁하며 1등할 친구가 누굴까? 하는 궁금함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선교사가, 전혀 엉뚱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34. 출발선에 나란히 서있던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한 것입니다.

35. 선교사가 궁금해서 “왜 그렇게 한거니?”라고 묻자 아이들이 과일을 먹으면서 “우분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36. 아이들이 보여준 이 순수함을 보면서, 교회가 무엇일까?를 고민했던 이 선교사님에게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37. 이분은 오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행해 이야기한 그 “견고함”을 찾은 것 같습니다.

38. 그러면 우리에게 이 견고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39. 요즘에 청년들과 이야기하면서 제가 하나 깨들은 것은 저도 청년 때 그랬는지 모르지만, 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꽤 예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0.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옮겨야 하듯이, 청년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1. 이건, 어려움에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깨지지 않아야 할까?라는 질문인데, 다르게 표현하면 어떻게 “견고해질까?”라는 질문입니다.

42. 청년들만 그런게 아닙니다. 성도들을 대할 때도 부서지기 쉬운 분들이 있습니다. 조심조심해야 간신히 뭔가를 해낼 수 있으니 목사는 늘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43.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분명히 교회는 그리고 여러분의 개인은 이 과정을 잘 지나가면, 견고함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들은 이 견고함을 갖추기 위해 날마다 넘어지고, 무너지고, 힘들어 할 것입니다.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 앞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믿음이 있다면.. 분명히 우리들은 견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45.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학교를 그만두고 라리쉬라는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46. 헨리나우엔이 쓴 영성일기를 라리쉬 공동체가 있던 지명을 따서 “데이브레이크로 가는길”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헨리 나우엔이 라리쉬 공동체를 통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47. 두가지 내용이 기억됩니다. 하나는 열명정도 되는 공동체에 “존”이라는 중년 남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늘 “집이 어디에요?”라는 질문을 헨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 건가요?”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48. 이 두 질문을 방문할 때 마다 받았던 헨리 나우엔이 점점 “내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그 집에 머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49. 두번째 이야기는 그곳에 머무는 또 다른 분은 헨리가 자주 방문하자 이렇게 물었답니다. “뭐 하는 분이에요?”

50. “하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라고 답했더니, “하바드가 뭐에요?”라고 묻는 말에 머뭇하면서 다시 “세계 적인 석학들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라고 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공부는 왜 하는 거에요?”

51. 이때, 헨리 나우엔에 큰 충격 비슷한 것을 경험하는데, 세상은 통념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데, 진지하게 물어오는 질문에, 특히 본질적인 질문에 자신이 스스로 발가벗겨져 가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52.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 “헨리는 누구에요~?”라는 질문에, 이들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가장 흡사한 시선을 가진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53.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진 배경, 직업, 경력에 관심을 갖는데, 이들은 오직 자신의 이름 “헨리”에 관심이 있는 것에, 하나님도 우리가 지금 겉에 두르고 있는 다양한 것 들에는 관심이 없고, “나 자신” 바로 “내 이름”에 관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54. 그날, 쓴 일기에, 헨리 나우엔이 이제 자신의 긴 영적인 방황을 끌 낼 수 있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늘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으로 배움의 길을 통해 더 배우고자 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또, 자신이 소유한 지적인 능력을 드러내면 혹시 “내가 어떤 길을 가야할지!”를 알 줄 알았던 자신이,

55. 단순하지만, 그리고 반복적이지만, 자신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물어 대는 질문으로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 집이 어디인지?를 진지하게 물을 수 있는 시간과 마주했다고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56. 이 이야기를 다시 되새기면서, 우리들이 함께 견고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 무엇인지 찾은 것 같습니다.

57.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공동체 서로 묶여 있습니다. 어떤 설명없이 우리들은 이미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58. 우리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교회들의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지워내고, 우리를 견고하게 할 우리들의 충분한 그릇이 무엇인지를 다시 되새겨야 우리들은 견고해질 것 같습니다.

59. 그러면 우리들은 열린교회라는 이름으로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60. 우분투~! 나의 행복이 곁에 있는 형제자매의 행복을 통해 실현되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대한다는 것은 내 행복에 관심이 없고, 나만을 위한 에너지에만 신경을 쓴다는 말이니 조심해야할 것 같습니다.

61. 그리고 교회안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경험과 경력 배운 지식, 직업, 다양한 개인을 평가할 수 있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오직 그 사람, 바로 나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면 우리들은 분명히 견고한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2. 2023년 저희교회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할 것입니다. 펜데믹 이후에 교회는 저마다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본질적인 것에 관심은 사라지고,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3. 우리들은 견고히 우리 교회의 비전을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64. 서로를 의심하지 말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고, “네 가 누구냐~!”라고 묻는 물음에 감사하며, 내 쉴곳이 어딜까? 라는 질문에 응답하며, 견고히 교회공동체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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