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2~17
“제가 여기 있습니다.”
누가 성경을 바로 읽고 있는가?
인디애나 퍼듀 대학에 김재수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경제학을 가르치는 분인데, 스스로 어릴 적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기독교인으로 소수 경제학자라고 불리는 분이고, “99%를 위한 경제학”이라는 책을 쓰신 분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색깔이 뚜렷한 분인 것 같은데, 이분이 성서 유니온에서 발간하는 “청소년, 매일 성경”이라는 큐티집에 “큐티, 경제학을 만나다”라는 제목을 글을 연재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경제 용어나 경제학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글을 쓰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3-4월 교재에, 아마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를 이 분 나름대로 풀어서 연재했던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달란트 비유의 쟁점은 주인이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겨놓고 멀리 떠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수익을 낸 종들과 달리 단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으로 주인이 질타하는 내용이 담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들어 어떤 분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자본주의자”라는 주장을 했는데, 아마 경제학자인 김재수 교수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해석과 다른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 연재된 글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게 되었고, 결국 김재수 교수의 연재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글들을 꼼꼼히 읽었는데, 제가 놀란 것은 이분이 쓴 글이 문제가 아니라, 이 분이 쓴 글에 대한 댓글 때문이었습니다. “마귀 새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지옥 불로 이끄는 거짓 교사, 사이비 이단 등” 험악한 말로 도배된 댓글을 보면서, 저에게 질문이 생겼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과연 누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으며, 예수님을 자본주의자라고 해석한 해석은 맞는 해석인가? 그리고 또한 가지, 성경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해서,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해 그렇게 험악한 답글로 혐오하고 불편함을 표현하는 배타성이 정말로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 얻어진 행위일까?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설교자의 고민, 성도의 고민: 성경을 대하는 태도
이 질문은 설교하는 목사로서 늘 고민하는 문제이면서도, 오늘날 성경을 읽어내는 성도들에게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사역하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목사로서 제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적 독점을 저질러온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라는 것이고, 성서 해석은 누군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지금 내 삶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히는 순간에 말씀이 살아서 역사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오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읽어내는 의미는 교과서적, 전통적이라는 용어에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여러분들이 부딪히는 삶과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하나님의 손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성령을 가르치는 바울의 노력
제가 가끔 말씀드린 것 같은데, 우리들은 지금 어느 정도 정리된 신학적 관점과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낼 수 있는 매우 럭키한 그리스도인음을 말씀드렸었습니다. 바울이나 초대교회 교부들 그리고 이후의 신학자들이 고민하고 싸우고 나름 보편적으로 정리된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읽은 본문은 “성령”에 대한 이해를 로마교회에 알리는 바울의 노력과 고민이 담겨있는 본문입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성령”은 무엇이고, “성령”받은 사람, 성령 받은 교회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를 바울은 함축된 문장을 통해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필요했던 것은 아마 당시에 “성령”을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있었고, 더불어, 너무 지나치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비적인 것에 집중하다 보니, “성령 받음”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교회가 어려워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로마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닌, 바울의 복음으로 변화 받은 동역자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보니, 특별하게 로마교회에 알려야 할 “성령의 능력”을 바울이 오늘 말씀을 통해 정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우리를 더욱 성령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안내해 주고 있고, 오늘 읽은 성경의 배경, 혹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이해: 확장된 성령의 이해- “하나님의 상속자 된 우리”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들이 성령에 역사, 성령 체험이 특별하게 성경에서 그려졌지만,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해지면서, 성령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고 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 누구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12절에서 13절에, 바울은 우리들이 더 이상 육신으로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영혼과 반대되는 혹은 윤리적으로는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육신의 존재가 아니라, 14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 곧 “성령”이 함께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과 함께 존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이성적인 영혼” 혹은 생명의 원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성령은 곧 우리를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절제함으로 이성적인 영혼을 소유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는 바울이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성령과 함께하는 이성적인 영혼으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호칭은 곧 예수님과 같은 상속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주어지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살아가는 존재로 변화된 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해 2: 거듭남은 성령을 통해, 니고데모 이야기
오늘 본문과 평행 본문인 예언서와 복음서에는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 그 변화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17에 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이었고, 율법교사였던 니고데모는 밤늦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율법교사이고,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밤에 예수님을 은밀히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고백하기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니고데모가 그리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곧 능력이고, 이런 능력은 바로 힘 있는 자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니고데모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이고, 모든 사람들의 추구하는 힘의 원리에서 나오는 생각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로 니고데모의 고백에 응답합니다.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응답에, 니고데모가 대꾸하기를 “그러면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런 엉뚱한 대화를 종결하는 예수님의 응답은 요한복음 3장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나지 않으면”. 우리들은 이것을 새롭게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문장으로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무언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토록 율법에 매몰되었던 유대인들이 생각한 특별함은 하나의 오차 없이 율법을 지켜냄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율법보다 중요한 것이 “거듭남, 즉 다시 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물과 성령”이라는 응답으로 거듭남의 완성이 어디서 완성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당시 초대교회가 이해한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 즉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이해 3: 인간의 기대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의지하기, 이사야의 변화
예언서 본문은 이사야서 6:1-8 말씀인데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라는 시간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남유다의 열 번째 왕으로 52년간 남유다를 통치했던 왕이었습니다. 드물게 웃시야 왕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왕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했고, 예루살렘 방벽을 견고히 하고, 군대를 강성하게 했으며 무역로를 회복해서 나라를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수지를 만들어서 농업을 활성화하는데도 기여했습니다. 이런 웃시야 왕이다 보니, 이사야 선지자가 기대하기를 웃시야 왕을 통해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것을 꿈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이 갑자기 죽게 되자, 낙심한 이사야의 이야기가 변화되는 이야기가 이사야 6장의 내용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뵈었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고, 스랍들이 주변을 날아다니는 환상을 봅니다.” 스랍들이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를 노래를 부를 때, 성전 문지방이 흔들리고, 성전 안에 연기가 가득할 때, 이사야가 곧 죽을 지도 모르는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인데..” 하나님을 본 것도 죽을 이유이고,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사야가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부정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때 스랍 하나가 이사야에게 날아오게 됩니다. 스랍이라는 존재는 “세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불길로 타오른 존재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사도행전에서 경험하는 “성령”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스랍이 이사야의 입술에 재단에서 타고 있던 숯을 집어다가 대었더니, 이사야에게 있던 “악도 사라지고, 죄도 용서되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다, 이사야가 응답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응답하는 것으로 본문이 마무리됩니다.
이사야는 스랍 곧 성령을 받고는 웃시야라는 사람을 기대하는 존재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낙심했던 존재에서, 기대와 희망으로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서 이야기했던 예수님 말씀처럼, 이사야가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성령의 의미 : 우리를 변화시킨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들은 분명하게 드러난 성령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우리를 변화로 이끌어갑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말씀에 목마른 자는 니고데모처럼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이 익숙하게 질문하는 혹은 열광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기적에 집중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다시 나지 않으면, 그것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또한 이사야가 자신이 인간적으로 기대했던 존재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한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성령은 우리를 변화로 이끌어갑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것, 인간적인 기대에서 하나님을 소망하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변화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존재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는 존재는 성경을 읽어내면서, 누군가를 적대적으로 대하거나, 혐오적이거나 배타적인 말로 응답하는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성경을 읽어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들이 분명하게 새겨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존재가 성령을 받음으로 변화되었고, 거듭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는 고백은 단지, 선교를 위해 부름받은 자에게만, 혹은 사명 받았다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고백이 아니라, 성령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상속자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어떤 상황에 놓여있던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신하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신하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함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는 결단을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 삼아 주신 거룩하신 주님의 은혜를 이 땅에 나누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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