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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4일 주일 설교원고



고린도후서 12:2-10

약한데서 완전해지기


스핀오프

영화를 소개하는 내용을 보다 보면, “스핀오프”라는 영화 장르가 있습니다. 흥행한 영화에 캐릭터를 하나 골라서 악역이든, 주인공이든 상관없이 “번외”편을 만드는 것을 “스핀오프”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 개봉한 “크루엘라”라는 영화는 “101마리 달마시안”에 악역이었던, “크루엘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스핀오프”와 비슷한데 조금 다른 장르 중에는 “프리퀄”과 “시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화가 끝이 났는데, 그 영화가 시작한 시점에서 좀더 과거로 돌아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주제로 만드는 영화를 “프리퀄”이라고 부르고, 미래를 그려내는 것은 “시퀄”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라는 영화가 개봉한 이후에 만들어진 시리즈들은 그 시점보다 앞선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이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시리즈를 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타워즈를 시리즈로 시간 순으로 보려면 복잡합니다. 요즘에 이런 스핀오프나 프리퀄, 시퀄 같은 장르의 영화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들에게 익숙한 영화 사업은 헐리우드를 대표로 하는데, 워낙 다양한 주제로 이미 영화를 제작해서인지, 새로운 각본을 찾기가 힘들다보니까, “스핀오프”나 “프리퀄” 혹은 “시퀄”이라는 방법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의 프리퀄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의 “프리퀄”과 같은 이야기라는 느낌을 줍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 바울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우선,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거짓교사들이 고린도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면서 특히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자들을 바울은 사탄이라고 지목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복음을 가리운자,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한번도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나누지 않은 경험을 나눔으로 “바울” 도 특별한 체험이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오직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변화받은 사람이다: 어떤 변화?

바울에 대해서 잘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바울은 유대공동체에서 매우 존경받는 자리에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엘리트 중에 엘리트로 자신의 자리가 보장받는 자리에서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를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결과는 바울은 더이상 승승장구 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이게 하였고, 고난이 늘 그 삶에 자리했으며, 또한 이전까지 없던 자신의 부족함이 더 부각됨으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열등감들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변증할 때 말을 더듬는 것이 문제가”가 되었고, “외모도 호감이 가질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는 몸에 “가시”가 바울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이야기한 “육신의 가시”를 “간질”이나 “피부병”등으로 이야기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몸 안에 있는 것인지, 몸 밖에서 보여지는 것인지 모를 이 “가시”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변화 받은 바울의 삶

바울이 쓴 편지로 지금 우리들은 “기독교를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은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실제로 바울이 경험한 삶은 복음을 전하면서 감옥에 갇히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했으며, 자기가 개척했음에도 교회들이 바울을 의심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바울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특별하게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3인칭 시점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나눔으로 보다 객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서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프리퀄: “신비한 체험”으로 바울은 주님을 만났었다.

2절에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문장 속에 “알고 있는 사람”도 자신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바울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14년전에 하늘에 올려진 경험을 간증하고 있는데, 한번도 나눈 적이 없는 자신의 체험을 지금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천국의 개념은 여러층의 단계를 넘어서야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비로운 경험이기는 하나, 실제로 고린도 지역에서는 헬라철학이 유행했기때문에, 비이성적인 체험이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담담히 나누고 있습니다. “셋째 하늘”이라는 표현은 거의 천국에 다다랐다는 의미일테고,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에 대한 표현은 정확하게 자신도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황홀경에 빠져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 4절에서 바울은 이같은 체험은 하나님의 비밀이기때문에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말해, 바울은 이런 체험을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체험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기때문에 함부로 자랑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신비한 체험 ”, 혹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함을 경험”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체험을 강조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흔들었습니다.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과 비교하며 혼란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이런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할 수 있나요? 방언하지 않으면 성령 받지 못한 겁니다.”, “하루에 기도를 몇시간 하나요? 최소한 4시간은 해야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재림에 대해 준비되어 있나요? 마지막 날이 얼마 안 남은 표징이 지금 나타나는데, 빨리 준비해야합니다..”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비슷한 체험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자랑할 것은 이런 환상의 체험보다는 “자신의 약점”밖에 자랑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교만이 아닌 부족함으로

바울은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것과 아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자랑을 늘어놓다 보면, 교만하게 될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적당한 자랑과 적당한 교만은 자존감을 높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자랑과 교만을 드러내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가시”로 인해 자신이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가시를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이야기 한 것을 보면, “가시”라는 것은 곧 자신이 겸손하지 않으면 교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복잡하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간단히 말하면, 자랑과 교만은 결코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강할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교만하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지식, 출신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바울은 오히려 자신을 인정할, 지식이며 출신이 모두 “가시”와 같은 것,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고서는 지금까지 자기가 누린 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관점이 생긴 것입니다. 그 새로운 관점이 바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자신의 약점을 가려야 합니다.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약점을 건드리면, 우리는 화를 냅니다. 그리고 미워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삶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참 미운 성도들입니다. 그렇게 공을 드려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가르쳤는데, 바울이 가짜라고 이야기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한테 사도가 맞는지, 바울의 가르침이 맞는지를 되묻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심하면 인연을 끊어냅니다. “다시는 보나 봐라”이런 것들이 흔히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하는 감정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자신 스스로를 높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지식을 뽐내고 교만하게 자신을 포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적한 자신의 약점을 바울은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9절에 유명한 말씀을 남깁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특별한 것,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 혹은 고난을 극복하게 하거나, 물질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만족하게 하는 것을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우리들의 프리퀼 떠올려보기

그러면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프리퀼”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14년전, 혹은 그 이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아마 그때 그런 결정을 했다면, 혹은 그때 그 주식을 샀으면 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다른 경험을 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각자의 프리퀼에 공통적인게 있습니다. “언제 복음을 받아들이고,” ,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순간”을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기억은 우리 모두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에 감사하고 은혜에 어쩔 줄 몰랐던 그 시간이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삶의 시간을 더듬어 보면, 우리들은 비슷한 경험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삶을 소망하실 수 있습니까? 비슷한 시간을 경험하면서 우리들이 드러낼 것이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약할 때 강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은혜 받은자가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과 든든히 동행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실패를 숨기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교만함으로 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복하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때,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가득 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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