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목사님의 부고소식을 들었습니다. 오고가며 반갑게 지내던 분인데 젊은 분인데 암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토론토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임종을 앞두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암투병으로 잘 견뎌왔는데 거의 마지막인듯 하다는 소식에 잠을 못이루었습니다. 이 친구는 이 날을 준비하며 아내가 목회의 길을 걷도록 미리 준비해왔습니다.
올해는 죽음이 멀지 않게 느껴집니다. 가까이에서 늘 동행하고 있고, 모르는 분이라도 이런 소식이 함께 들려오면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그렇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이 더 크게 와닿습니다.
아이들이 수련회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예전과 다른 분위기를 경험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고 아마 저 너머에 무언가를 확신하고 돌아온 느낌입니다.
펜데믹동안 연락이 끊겼던 교우를 수련회장에서 만났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유스캠프에 참여한것이니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들 크는 것 보면서 나이든 거 느낀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경험과 이런 이야기들은 이제 제 삶에 주요 메뉴처럼 읽혀질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지에서 이제는 어떤 삶을 살아왔지?라는 질문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이분은 어떤 삶을 사셨지?가 궁금해지고 여전히 부족하게 느껴지는 제 삶의 무게를 보며 오늘도 치열하게 스스로를 단금질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늘 박해의 두려움에서 끊임 없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봤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든든히 이겨낸 바울의 모습이 그려지지만, 여전히 박해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바울은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읽혀지니 바울의 무게있는 삶을 잠시 내 삶과 비교해보았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예전만 못하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가득 밀려왔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그리고 맞이할 두 목사님들은 끝까지 강단에서 설교를 놓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목사의 삶을 포기 하지 않고 목양일념의 삶을 살았다는데 저는 이 두분을 기억할것 같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되는 시간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결국 이 기억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누군가를 환하게 비춰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으로 살아온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할까요?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중보기도
이번주 주일은 유스아이들이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윤지은 전도사님이 말씀을 전합니다.
반주자를 구하고 있습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