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히고는 다시 회당앞에서 섰습니다. 그곳에서는 스스로를 바리새인임을 알리고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분리해냅니다.
사도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지만, 바리새인들을 부활을 믿습니다. 이 상반된 두가지 믿음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믿고 있는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주목하게 합니다. 급기야 바리새인중에 한사람이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면 어떻게 하냐?는 문제제기를 사람들이 더 술렁거립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울은 지혜롭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도 이렇게 할것을 성령이 당부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테레그래프를 거쳐서 밴크로프로 좌회전해서 갑니다. 개학을 앞둔 학교가 정신없습니다. 길가에 학생들을 거쳐서 가는길은 복잡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진풍경을 보기 위해 늘 그곳을 지나칩니다. 다양한 인종속에서 휴대용 스피커로 소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젊은 친구가 꼭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무시무시한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신호대기로 잠깐 멈춰선 시간에 들어도 대충 그런 내용들입니다. 아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실천하고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에는 다양한 분량과 실천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일방적인 것에 대한 궁금함이 있습니다. 과연 이런 담대함(?!)이 복음을 전하는 영향력있는 행동일까? 모두가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자리에서 큰소리로 “회개”를 외치고, 창문열고 운전하며 복음성가를 크게 틀고 지나가는 저를 오러랩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담대한것은 무엇일까?
바울의 지혜를 통해 담대함의 방향도 살펴야할것 같습니다. 이번주 청년들이 헌신예배를 드리고, 청년부흥을 위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기도해주시고, 어렵겠지만, 지혜로우면서도 담대하면서도 매력있는 활동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중보기도
청년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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