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누가복음 5:32)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의인이면서 죄인으로 묘사됩니다. 극단적인 두가지 묘사사이에 독자들은 애매한 판단으로 장발장을 읽어냅니다. 빅토르 위고의 뛰어난 문장력은 우리를 혼돈의 시간으로 초대합니다. 방대한 양의 소설에서 우리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장발장의 억울함과 그의 성공을 기원하며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속에 막막하고 어두운 현실을 뚫고 마침내 선이,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법이란, 원래 이런 것들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상참작이라는 애매한 용어가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정상참작으로 벌을 내리는 무게가 조금 가벼워질 뿐 죄가 완전히 용서되지는 않습니다. 장발장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정상참작이 완전히 무시된 너무 무거운 형벌이 가해졌기때문입니다. 이 애매한 용어들이 늘 일상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냉정한 법의 잣대가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냉정하다는 풍자의 용어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현실을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인간사는 늘 완벽한게 없고 자기가 생각한 것이 가장 완벽하다는 주장만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시작이 다른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들을 불러서 회개 시키러 왔다”는 선언은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던지신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심의 방향이 죄인에 있다는 존재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앞에 관성적 전통들은 박살나고 전혀 새로운 방향에 눈길이 가도록 이끌어 냅니다. 사순절의 묵상의 방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관성적 삶의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선돌리기가 지금 우리들이 사순절을 보내는 진실된 마음 가짐인것 같습니다.
묵상
내안에 가득한 관성적 삶의 방향이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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