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26-34
하나님 나라 발견하기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것이 우리들이 이해하는 간단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해인데, 일전에,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간단한 내용 같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혼란 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가지, 구원 받았다는 의미는 어디서 무엇을 구원받았다는 의미일까? 라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성경적이라는 말을 붙여서, 우리는 성경적인 구원을 가르치는 교회 혹은 교단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곧 영생에 이르렀다고 말하는데, 구원을 이해하는데 다양하게 설명하지만 간단하고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우리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살게 되었다로 이해하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질서에 속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역이나, 우리들이 이해하는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이해, 즉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움켜쥐고 있던 힘있는 것들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에 속하는 것이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예수를 믿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질서에 속하게 된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선포하신 것을 믿음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신뢰의 개념에 가깝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이 “오빠 믿지?”하는 믿음하고, 예수님을 믿어요! 라는 믿음이 다르다는 정도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빠 믿지?”에 대한 믿음은 미덥지 못하지만, 믿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을 믿는 것, 즉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에 대한 믿음을 혼동할 필요가 없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전적인 믿음 즉 모든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말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존재: 하나님 나라 이해하기 2
요즘에, 근처에 젊은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한 교회가 Reddit이라는 포털사이트에서 “영적 학대”에 대한 이슈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힘든 대학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이 주로 모이는 이 교회는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남성이 여성을 주도해야한다는 신앙생활을 지침으로 공동체를 꾸리는 교회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여자는 절대로 고백하면 안되고, 남자가 고백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이 공동체가 젊은 청년들에게 가르치는 성경적 데이트의 모범이라고 합니다. 이게 신앙이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이 교회의 특징은 전적인 헌신을 강조하고,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는 청년들을 교회 멤버로 나중에는 리더로 그리고 더 나중에는 각 주에 캠퍼스에 교회를 개척을 하면 직장을 옮겨서라도 헌신하게 하는 교회로 유명합니다. 얼핏 봐서는 굉장히 믿음 좋은 공동체로 보여지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이 공동체가 이렇게 까지 헌신하는 청년들을 훈련시키는 방향은 일방적인 방향, 순종을 신앙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질문 없는 신앙생활, 그리고 어떤 것보다도 선명한 구원의 방향이 드러나야 좋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좋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선명한 구원관, 명확한 믿음이라는 것은 그 이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역사에 대해서는 침묵 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발견할 때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키운 자식인데 도 너무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같이 함께 살지만 배우자에 대해서 명확하게 잘 모르겠다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떨 때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으니 당연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더욱 명확한 것을 찾으려고 하고, 분명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제로 신앙생활은 분명한 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지만, 믿음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는 눈에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를 소망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단단히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1: 좋은 마음 밭을 준비하라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중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하나는 씨뿌리는 농부의 관점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의 이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겨자씨를 통해서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이전에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어떤 마음 밭”이 말씀의 씨앗을 받아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말씀하셨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다른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 안에 맡겨 주셨는데, 그 비밀은 씨앗을 뿌리듯 우리 안에 뿌려졌다는 것을 이해하시면, 오늘 읽은 말씀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마음 밭을 통해 그 열매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기도 전에 이 전제 에 마음이 탁 걸리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마음 밭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전통적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한 마음 밭에 담아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의미로 이해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과 연결해서 보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만들어내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 2: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에 있다.
이렇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스스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농부는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8절-29절에서도 보면, 씨앗이 땅에 뿌려진 후,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싹이 나고, 이삭을 내고, 알찬 낟알을 내고는 열매가 익으면, 추수 때가 돼서 낫을 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 막상 씨를 뿌린 농부는 이것이 어떻게 일궈지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저도 농사를 져본 적은 없지만, 씨뿌릴 때와 거둘 때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햇빛과 땅의 기운에 따라 열매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은 “규범적 지혜”로 보편적인 지혜라고 부릅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계절이 바뀌고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을 우리들은 마찬가지로 “규범적 지혜”라고 부릅니다. 이런 규범적 지혜를 거스르고 사는 사람을 우리들은 정상적이 않은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날이 추우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고, 더우면 시원하게 입어야 하듯이,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추수를 해야하는데 이것을 거꾸로, 가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추수를 하려는 것은 세상의 이치 혹은 마땅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규범적 질서”즉 패턴으로 습득한 지혜에 순응하지 않는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 씨를 뿌린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 나라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늘 부딪히는 규범적인 지혜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어떤 분들은 굳이 종말적 관점을 통해 이해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 등장하는 추수의 개념때문에 혼돈하는 분들이 있는데, 씨를 뿌리고 추수할때까지 일련의 과정은 말 그대로 우리들이 경험하는 자연적 섭리이며, 규범적인 지혜로 당연히 알 수 있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잡하지 않고 우리들이 경험하는 씨뿌리는 시간부터, 추수할시간까지를 발견하 듯,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 가까이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 3: 겨자씨가 큰 나무 되듯 작은 것은 하나님의 질서로 큰 역활을 한다.
30절에 예수님이, 또 다른 비유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시면서 말씀하신 비유가 바로 겨자씨에 대한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보다 작다”는 것으로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이유가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겨자씨라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을 통해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작고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땅에 심겨지면, 나중에는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를 뻗어서 새들이 그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겨자씨는 우리들이 아는 좁쌀만하지만, 심어서 나고 자라면 제법 큰 나무가 되어서 새들이 쉬어가고, 그늘을 만들어냅니다. “세상의 어떤 씨보다 작다”로 시작하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입관, 혹은 오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앞선 본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우리들이 생각한 보다 가까이에 있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 본문에서는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이루어내는 겨자씨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큰 나무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복잡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뜻이 숨겨져 있으며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열매를 맺고 크게 자라면 처음에 작다고 무시했던, 보잘 것 없다고 관심 갖지 않았던 것들이 새들에게 쉼을 내어주고, 큰 그늘을 만들어내는 귀한 것으로 바뀌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작고 작은 자들을 통해서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우리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존재이기도 하고, 때로는 익숙한 비교로 판단을 하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씨를 뿌리면 알아서 자라서 열매를 맺고 추수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렇게 반드시 자라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자라난다는 것이 과연 그럴만한 자격 혹은 그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리 작고 작은 씨앗, 즉 보이지 않는 존재도 하나님의 뜻을 품으면 누군가에게 생명을 나누는 큰 열매, 큰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영토 영역의 개념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내시고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임재, 능력, 특별한 에너지”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 :하나님 나라 깊이 이해하기
앞에서 잠깐 “규범적 지혜”라는 이야기를 드렸는데, 살면서 늘 이런 지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하나의 패턴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면서 얻어지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패턴과 상관없는 “반성적 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성적 지혜는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일정한 패턴에 대해서 질문하게 합니다. “과연 그런가?” 신앙생활은 규범적 지혜 쪽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신앙을 완성해가는 것은 “반성적 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은 농부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한 규범적 지혜가 일정한 패턴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는 정보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뿌린 대로 거둬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뿌린 것보다 많이 얻을때도 있고, 적게 얻을 때도 있습니다.
반성적 지혜: 우리들이 질문으로 완성할 것들
오늘날 신앙생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는 “성취”를 통해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가를 묻습니다. 성도는 얼마나 큰 교회인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지난주에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수들 중에는 학생들끼리 경쟁을 시켜서 그중에 그 경쟁을 이겨낸 친구를 제자로 삼고 다른 친구들은 내쳐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뭐 그런 교수가 있을까? 싶은데, 그런 교수는 성취도 대단하다고 합니다. 좋은 논문, 연구결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다고 합니다. “좋은 성취”는 그만한 댓가가 따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고 그래야 성공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규범적 지혜로, 분명한 패턴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패턴에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과연 전통적으로 마련한 율법만이 구원의 조건인가? 이 질문은 반성적 지혜를 통해 “과연 그런가?”에서 출발한 질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떤 일정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성취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또한 믿고, 예수님이 하신 행위 또한 믿고 기존에 하나님의 구원은 여기서 온다 저기서 온다는 것에 “과연 그럴까?” 하는 질문을 통해 온전한 구원의 역사에 우리들의 삶이 동행하기를 노력함으로 좋은 열매 맺도록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할 수 있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통해서도 큰 열매를 이루어 내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해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로 우리들을 살아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취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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