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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일 주일 설교원고, 성령강림후10주



에베소서 4:1-16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공동체성

눈치채신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의 목회에 가장 중요한 방향 중에 하나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개념이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공동체성을 우리 교회만을 위한 내용이 아니며, 우리 교단안에 있는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동체성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어릴 때 기억나시는 분들은 계실지 모르지만, 교회는 늘 연합했고, 함께 사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남의 잔치를 위해 축하하는 의미로 함께 참석하였었고, 연합수련회, 연합행사들이 예전이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개교회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도 많이 생겨나고, 교단도 알게 모르게 많이 생겨나고, 이런 저런 차이들 때문에 함께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볼 수 도 있습니다. 한동안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가 자리하면서, 우리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교회가 교회를 경쟁하는 구도로 분위가 바뀌면서 이런 개교회 주의는 더욱 가속화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희들이 속해있는 우리 연회의 한인연합감리교회는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지속적으로 연합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 북가주 한인연합감리교회 중고등부 연합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 권조셉 목사님이 수고하셨는데, 처음으로 다녀온 저희 아이들이 갈 때는 가기 싫은 표정에서 올 때는 매우 밝은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이 수련회가 참 귀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매년 해온 이 연합수련회는 아이들이 대학을 가서도 카운셀러로 꼭 참석하고 싶어하는 수련회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아이들을 돌보는 리더쉽을 발휘하면서 세워지는 수련회를 보면서, 이런 귀한 연합 사역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 아이들이 수련회를 통해서 든든히 세워질 것을 생각하니 큰 기대를 갖게 하는 한 주였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성: 우리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

제가 공동체성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부담이 되는 이야기라고 하셔서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공동체성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을 더욱 가깝게 연결해야 하고, 익명성을 배제하고 좀더 교회 안에 헌신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부담”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공동체성이라는 것은 단지 교회의 연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다양한데, 교회도 다양하고, 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양도 다양합니다.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하나로 만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되었고,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헌신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공통된 사명, 즉 이 세상에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돌볼 수 있는 가를 고민하자는 내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될 때, 동시에 우리들이 깊이 배운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조심했을 때, 바이러스이 위험을 줄어들고, 우리들이 걱정하는 시간을 속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배웠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성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의 생각, 하나의 방향으로 대동단결하자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함께함으로 이 다양함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일들을 함께 하자는 것에 마음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면, 가끔 제 연락처를 알고 이쪽으로 이주하려는 분들이 전화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지역에 대한 정보를 부탁하는 분들도 있지만, 집을 구해달라, 직장을 구해달라는 분도 있습니다. 잘아시겠지만, 저는 집을 구할 능력도 못되고, 직장을 구할 능력도 못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다가, 교회 목사에게 연락하는게 신뢰도 가고, 그만큼 간절하니까 연락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되도록이면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아줍니다. 옆에서 보면, 목사님 오지랖이 태평양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는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공동체성은 바로 이런 것을 통해 실천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교회에 나오는 의미에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 너머의 공동체에 오시려는 분을 도우려는 마음이 잘 자리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와 교회의 연결은 물론이고, 우리 교회안에서도 좋은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세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느 책에서 읽은 문장인데, “손 내밀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고, 내민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 문장은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공동체를 살아가야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당부하고 있는데, 오늘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부름 받은 자의 합당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베소교회: 공동체성을 어떻게 세울것인가?

오늘 본문을 읽기 전에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쓴 편지는 감옥에서 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의 옥중서신 즉 감옥에서 쓴 편지 중에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주제로 편지로 썼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이, 노예와 자유인들이 섞여 있던 에베소교회에 바울은 서로가 다른 출신, 인종, 혹은 사회적 배경을 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숙제들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한 바울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와 비슷한 과제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 환경을 함부로 다루는 문제,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시되는 존재들에 대한 문제 그리고 때로는 무관심속에서 잊혀지는 공동체 안에 식구들, 오랜 펜데믹으로 예전과 같지 않은 단절된 관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에 익숙한 삶 등 이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바울이 권면하는 “하나됨”의 지혜와 사명을 확인해야합니다. 요즘은 이런 용어들을 시민운동 혹은 사회운동에서 주로 사용하지만, 실제로 성경에서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늘 고아와 과부 가난한자, 이방인에 대해서 긍휼함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늘 사람들이 정해놓은 경계를 넘어서 기쁜소식으로 선포되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

우선, 바울은 하나됨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구별되었다는 의미는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레위기와 베드로전서에서 전하는 우리의 특별한 존재를 인식하라는 의미입니다. 구별됨이란 거룩한 하나님의 삶에 동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에,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서로 깍듯이 대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과 서로를 용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겸손함은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교만한 사람과는 관계하는 것이 힘들고 겸손한 사람과는 더욱 관계하고 싶은 게 우리들이 경험하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관계하기 힘든 사람은 “천상 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자기만 세상의 중심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 중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겸손과 온유를 처음에 꺼낸 이유는 교회공동체는 겸손함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자기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온유함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라는 것은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만들어지는 실천적인 행위입니다. 인내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내를 통해 우리들은 “사랑”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면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다 인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내함으로” 사랑은 더 명확하게 드러나지고, 그래야 비로소 서로를 용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말 같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서로를 용납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어떤 분은 함께 사신지 40년이 지나도 서로를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가끔은 “이 원수야”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합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은 완성되어진다는 것을 우리들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있고, 바울은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이루어야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의지로 되질 않습니다. 요즘 저는 예전처럼 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늘 하루에 만보 이상을 걸었었는데, 펜데믹을 보내면서 자리에 앉아서 숨만 쉬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늘 잠자리에 들 때 내일은 꼭 운동을 해야지 하다가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고 맙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떡거리며 동의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생각은 있지만,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준 것을 힘써 지킬 것”을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이 명확하게 들어오질 않는데, “평화의 띠로 묶어서”는 원서성경에서는 “συνδέσμῳ τῆς εἰρήνης. (soon´-des-mo, He, i-ray´-nay)라는 말로 “평화로 묶여져야” 성령 안에 거하게 되고,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서로 평화를 지켜야 성령안에 누리는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이고 우리들이 노력해야한다는 것은 서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부르심을 받을 때 그 목표인 소망도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어지는 본문 5절에도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를 이루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지금까지 하나됨, 평화를 이룸은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이 논리적인 화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들 각자가 서로 너무나 다르고, 분명히 일치할 수 없는 각자의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선, 바울 에베소라는 도시의 특수성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고, 종교적으로는 다양한 종교가 함께 하는 도시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등 패권국가들이 득세할 때 마다 그 흥망성쇠에 중요한 영향을 받다 보니까, 다양성이 존재하는 도시였습니다. 우리들이 잘아는 세계 7대 불가사리중에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존재하고 있고, 로마시대에는 도미니티아누스 황제의 신전이 있을 정도로 이 곳을 정복한 국가들은 에베소가 종교적 정치적 이념의 중심으로 자신들의 통치이념을 세워 가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처음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반면, 너무나 쉽게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성경은 에베소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다양성에 혼란스러워하는 성도들에게 “다양한 가운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7절 말씀에 보면, 바울이 이해한 다양성에 대한 복음적인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4:7절)


바울은 다양성에 대해 각자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서로 다르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있고, 바라보는 곳이 다르지만, 거기에 맞게 “한 분 하나님”이 선물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보면, 다양한 통로로 은혜를 경험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찬양으로 은혜 받는 분, 말씀으로 은혜 받는 분, 교회 밥으로 은혜 받는 분, 성도들의 헌신으로 은혜 받는 분, 어떤 분은 청년들이 교회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가 각자의 삶의 환경에 따라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세계에 전해졌을 때, 나라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랐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복음을 받아들이 사람들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은혜를 고백했고, 가난한 나라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는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하며 은혜를 경험했고, 노예였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는 “자유를 이끌어주 실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서로의 삶의 자리, 그리고 경험이 다를 때, 한 분이신 하나님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각자에게 맞는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익숙하지 않다

우리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경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처음부터 익숙하지 않은 것을 자신의 삶으로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부딪히는 현실에 늘 고민하고 힘겨워하고, 어쩔 때는 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차별이나 구별, 혹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무시되어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문제들이 에베소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사랑에 충실했던 교회가, 다름에 대한 반응으로 분열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아시아인과 유럽인, 노예와 일반인, 가난한자와 부자 등 우리들이 구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평화를 이룰 때, 우리가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가 될 수 있고,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며, 사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각자의 특성을 무시하고, 서로가 다른 것을 포기하고 “하나”가 되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름에 따라 한 분이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깊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선포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다름”에 혼란스러워하고,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마음이 들 때, “평화를 이루어야 성령 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히 한분 하나님이 “나”와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주셨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평화에베소서 4:1-16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공동체성

눈치채신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의 목회에 가장 중요한 방향 중에 하나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개념이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공동체성을 우리 교회만을 위한 내용이 아니며, 우리 교단안에 있는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동체성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어릴 때 기억나시는 분들은 계실지 모르지만, 교회는 늘 연합했고, 함께 사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남의 잔치를 위해 축하하는 의미로 함께 참석하였었고, 연합수련회, 연합행사들이 예전이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개교회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도 많이 생겨나고, 교단도 알게 모르게 많이 생겨나고, 이런 저런 차이들 때문에 함께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볼 수 도 있습니다. 한동안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가 자리하면서, 우리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교회가 교회를 경쟁하는 구도로 분위가 바뀌면서 이런 개교회 주의는 더욱 가속화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희들이 속해있는 우리 연회의 한인연합감리교회는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지속적으로 연합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 북가주 한인연합감리교회 중고등부 연합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 권조셉 목사님이 수고하셨는데, 처음으로 다녀온 저희 아이들이 갈 때는 가기 싫은 표정에서 올 때는 매우 밝은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이 수련회가 참 귀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매년 해온 이 연합수련회는 아이들이 대학을 가서도 카운셀러로 꼭 참석하고 싶어하는 수련회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아이들을 돌보는 리더쉽을 발휘하면서 세워지는 수련회를 보면서, 이런 귀한 연합 사역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 아이들이 수련회를 통해서 든든히 세워질 것을 생각하니 큰 기대를 갖게 하는 한 주였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성: 우리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

제가 공동체성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부담이 되는 이야기라고 하셔서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공동체성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을 더욱 가깝게 연결해야 하고, 익명성을 배제하고 좀더 교회 안에 헌신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부담”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공동체성이라는 것은 단지 교회의 연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다양한데, 교회도 다양하고, 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양도 다양합니다.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하나로 만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되었고,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헌신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공통된 사명, 즉 이 세상에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돌볼 수 있는 가를 고민하자는 내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될 때, 동시에 우리들이 깊이 배운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조심했을 때, 바이러스이 위험을 줄어들고, 우리들이 걱정하는 시간을 속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배웠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성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의 생각, 하나의 방향으로 대동단결하자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함께함으로 이 다양함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일들을 함께 하자는 것에 마음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면, 가끔 제 연락처를 알고 이쪽으로 이주하려는 분들이 전화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지역에 대한 정보를 부탁하는 분들도 있지만, 집을 구해달라, 직장을 구해달라는 분도 있습니다. 잘아시겠지만, 저는 집을 구할 능력도 못되고, 직장을 구할 능력도 못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다가, 교회 목사에게 연락하는게 신뢰도 가고, 그만큼 간절하니까 연락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되도록이면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아줍니다. 옆에서 보면, 목사님 오지랖이 태평양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는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공동체성은 바로 이런 것을 통해 실천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교회에 나오는 의미에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 너머의 공동체에 오시려는 분을 도우려는 마음이 잘 자리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와 교회의 연결은 물론이고, 우리 교회안에서도 좋은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세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느 책에서 읽은 문장인데, “손 내밀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고, 내민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 문장은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공동체를 살아가야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당부하고 있는데, 오늘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부름 받은 자의 합당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베소교회: 공동체성을 어떻게 세울것인가?

오늘 본문을 읽기 전에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쓴 편지는 감옥에서 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의 옥중서신 즉 감옥에서 쓴 편지 중에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주제로 편지로 썼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이, 노예와 자유인들이 섞여 있던 에베소교회에 바울은 서로가 다른 출신, 인종, 혹은 사회적 배경을 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숙제들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한 바울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와 비슷한 과제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 환경을 함부로 다루는 문제,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시되는 존재들에 대한 문제 그리고 때로는 무관심속에서 잊혀지는 공동체 안에 식구들, 오랜 펜데믹으로 예전과 같지 않은 단절된 관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에 익숙한 삶 등 이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바울이 권면하는 “하나됨”의 지혜와 사명을 확인해야합니다. 요즘은 이런 용어들을 시민운동 혹은 사회운동에서 주로 사용하지만, 실제로 성경에서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늘 고아와 과부 가난한자, 이방인에 대해서 긍휼함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늘 사람들이 정해놓은 경계를 넘어서 기쁜소식으로 선포되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

우선, 바울은 하나됨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구별되었다는 의미는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레위기와 베드로전서에서 전하는 우리의 특별한 존재를 인식하라는 의미입니다. 구별됨이란 거룩한 하나님의 삶에 동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에,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서로 깍듯이 대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과 서로를 용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겸손함은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교만한 사람과는 관계하는 것이 힘들고 겸손한 사람과는 더욱 관계하고 싶은 게 우리들이 경험하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관계하기 힘든 사람은 “천상 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자기만 세상의 중심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 중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겸손과 온유를 처음에 꺼낸 이유는 교회공동체는 겸손함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자기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온유함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라는 것은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만들어지는 실천적인 행위입니다. 인내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내를 통해 우리들은 “사랑”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면 인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다 인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