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1-9, 14-15, 21-23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
고백과 행위는 일치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율법을 행하는데, 마음도 함께 있는가? 아니면 형식적인가? 이 질문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도덕적 윤리적인 질문입니다. 연예할 때, 연인끼리 이렇게 묻습니다. “자기야 나 사랑해?” 그러면 “그럼 사랑하지?” 라고 답하면,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니지”라고 되묻습니다. 확인절차인데, 말로만 그렇게 고백하면 안된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복무신조라는 것을 외웁니다. 외우다 보면, 젊은 청춘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준열하게 문장을 잘 지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군생활을 하다보면, 그렇게 외웠던 복무신조는 사라지고, 언제 군생활이 끝날까? 만 생각합니다. 이처럼 관계도 그렇고,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그 정당성을 위해 고백과 행위가 일치해야 합니다. 공동체도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면, 공동체의 생명력은 끝나게 됩니다. 진부한 질문이지만, 교회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말씀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은?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는 건물도 어떤 제도나 원리나 임원이나 직분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 받은 제자들이 “말씀을 선포”하고 그렇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것들을 나누고 구제하고 사람과 사람을 사랑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형식, 설교, 찬양등 다양한 예배 요소들이 첨가되면서 주일에 정기적인 모임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원래 교회라는 의미는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데, 정치적인 모임 이라는 뜻이 강한 이 단어를 바울이, 회당과 구별하여 교회라는 의미를 사용하면서 “교회”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들이 지금 모이는 교회의 원형은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이고 그렇게 배우고 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곳이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누군가가 교회는 뭐하는 곳이냐는 질문에 우리들은 이렇게 답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배우고 그 배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 아는것과 실천, 이 두가지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배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기독교인들이 배울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씀을 배운다. 말씀을 실천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말씀이 무엇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은 성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배우고,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인데, 성경대로 살아가야한다는 의미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구약부터 우리들의 삶에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는데, 그러면 우리들이 삶으로 실천해야 할 복음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라고 물으면 명쾌하게 이야기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은 크게 두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제가 가끔 말씀을 드렸는데, 역사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과 문학적으로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 방법의 공통점은 본문의 배경과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출신이나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두고, 역사적인 연구로 읽는 분들은 되도록이면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본문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서고고학이나, 역사적인 통시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나열하며 성경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입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올브라이트라는 구약학자가 있는데, 이분은 성서고고학으로 성경을 더 풍요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말씀이란? 성경을 읽는 두가지 방법
문학적인 방법은 최근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연구하는 방법인데, 객관적인 사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본문의 맥락 그리고 동시대에 기록된 다른 문서를 통한 이해를 추구하거나, 사용된 단어나 문장을 언어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하기도 하는 복잡한 인문학적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어느것이 옳으냐? 개인적인 생각은 이 두가지 방법을 함께 사용해서 성경을 읽어야 성경을 오독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성경이 옛날에 쓰여진 본문으로 그대로 보려고 하지 말고, 지금 내 삶, 내 컨텍스트에 말을 건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로, 설교자로서 제가 하는 작업이 바로 이런 작업들입니다. 본문을 깊이 읽고 지금 우리들의 삶과 부딪혀서 주어지는 질문, 과제, 어려움등을 정리해서 설교문을 쓰려고 하는 것이 제가 주로 하는 방법인데, 이번주 말씀은 바로 우리들이 배우는 말씀이 무엇이고?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가 저에게 진지하게 질문 되어졌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지 않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끝에서 나눠 보기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바리새인, 율법학자 VS 예수님
오늘 읽은 본문 이전에 예수님의 사역은 몰아치듯 일어났습니다. 병든자들은 물론이고, 오병이어 기적, 폭풍을 잠잠케하신 일등, 사람들의 주목할 수 밖에 없는 기적들이 몰아쳤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상황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자,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일어난 상황을 확인하고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러왔겠죠.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니까, 이들이 온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당장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못마땅합니다. 주목받는 예수님을 보러 온 이들이 온 것은 “혹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있을 지 모르는 실수 혹은 잘못된 것”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아니 스스로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습관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 지를 확인하고 지적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경박스럽다는 생각이 드는데, 은혜와 사랑~! 하나님의 손길을 자기들의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향해 마음대로 들이댄다는 것이 과연 신앙생활에 어떤 폼과 영향을 미칠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왜곡된 신앙: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가 이것을 지적하고 예수께 물어봅니다.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우선, 이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다.” 율법을 잘 지키는가를 감시하며 남을 지적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모양을 갖추지만, 그 속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산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8절에서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너희는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라는 말씀으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들이 세운 전통이 중요한가?”에 대한 예수님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우리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과 연결해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며 말씀을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에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 관성으로 이어지는 신앙적인 행위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관성을 깨고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에 동행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대로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은 겉으로 신앙이 좋아 보이고 말씀을 아는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발견되는 불일치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시점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율법적 행동 주위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왜곡되는 정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이 처음에 주어졌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지만, 그 율법에 무게를 두다보니,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는지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냐 안지키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세워놓은 잣대 혹은 세상이 만든 전통으로 판단을 하고, 지적을 하니, 견뎌낼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제외하고는 율법의 관점에서는 모두 죄인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성경의 전체의 맥락에서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할 일은 고아와 과부, 이방인 그리고 고난받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의미는 우리가 미쳐 챙기지 못하는 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께 십의 일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십일조 정신을 이어간다는 의미는 내 수익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드려야 한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받는 자들을 생각하면서 드린다는 고백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명과 상관없이 목격하게 되는 오늘날의 교회는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처럼 세상을 함부로 심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권세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지난번에 한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때, “현장 예배의 고집”을 내세우며 집단감염의 원인이 된적이 있습니다. 이로인해 교회는 세상 어느 공동체 보다 소통이 없는 공동체로 비춰졌고, 이웃을 위해 사랑 해야고, 고난받는 자들을 위해 노력해야할 교회가 대면예배를 멈춰 달라는 요청을 교회핍박으로 받아치는 모습에서 우리들은 오늘 주어진 질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14절에서 15절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이 이런 이중적인 삶에 빠져있는지에 대해서 무리들에게 자세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6절에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율법으로 사람을 깨끗게하게 하고 정결하게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깨끗함과 정결함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결정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23절에도 보면, 모든 악한 것은 모두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드러내느냐, 즉 우리안에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가가 우리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들은 지켜야할 것이 있고 마땅히 해야할 삶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함은 눈으로 드러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 밭으로 행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그 마음을 알아채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어떤 에너지를 뿜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분위기라는 게 있습니다. 분위기가 좋다, 안좋다를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분위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말과 행위의 일치는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처음에 한 질문과 함께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은 예배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의 마음밭을 갈아 엎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드러내고 있고, 우리를 통해 어떤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는 지를 살펴보면, 지금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내 겉치레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을 늘 갈아엎어서 한알의 밀알이 수 없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확인하려고 하면, 당연히 마음이 뿜어내는 기운으로 우리들의 삶의 모양을 갖춰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가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보니까, 환경과 배경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위와 말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밭이 어떠냐야 따라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문제를 새롭게 다루어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우리에게 하느냐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기쁜 소식을 마음밭에 심어두고 피어나는 열매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내 삶에서 역사한다는 의미는 줄 곧 성경말씀이 품어내고 있는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고 보다 더 깊은 마음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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