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8월8일 주일 설교 원고



에베소서 4:25-5:2

한몸 지체


연대의식

말도 많던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어쩌다 중계를 보면, 각국의 선수를 응원하는 각나라의 선수들의 열정을 보게 됩니다. 아마,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신의 나라의 국기를 흔들어대며, 가장 큰 애국심을 보여주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우리들은 이런 저런 연결관계를 확인하고 동질감 혹은 연대의식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들이 흔히 국뽕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작위적인 애국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내용들을 접하기도 하지만, 올림픽에서는 이런 애국심은 적절하게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이런 연대의 의식에 대해서 에밀 뒤르겜이라는 프랑스 사회학자는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를 이미 20세기 초에 이야기했습니다. 기계적 연대라는 것은 절대적인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 예를 들어 산업화를 겪게 되면서 유사한 업종에 종사하는 자들이 갖는 일종의 동질감 혹은 공동체 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런 관계에서는 가끔씩 공동체가치를 너무 높게 생각하다 보니까, 개인을 억압하면서 공동체의 관습적인 삶에 동참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유기적 연대는 서로의 필요에 의한 상호의존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한 사회 공동체가 구성되려면, 여러가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분업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의존함으로 사회공동체를 든든히 세워간다는 의미입니다. 지난번에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페르디난트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라는 것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번역되는 이 두 단어는 뒤르겜의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와 연결해서 보면 복잡하고 다양한 공동체의 모양들을 그려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보니까, 기독교공동체가, 적어도 지금 우리들이 함께 생활하는 열린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양으로 이 자리에 자리하고, 앞서 사회학적 이론의 공통분모들을 조합함으로 기대하는 것은 유기적인 공동체이면서, 공동사회로서 이 시대에 맞는 바른 기독교공동체로 세워지기 위해 우리들이 지금 어떤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는 서로를 의존하는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유기적 공동체로서, 거기에 이익사회가 아닌, 희생을 통해 공동사회로서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을 소망한다면, 우리들이 기대하고 소망하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읽기, 제 1독서: 사무엘하 18장

오늘은 제1독서, 구약의 사무엘하 18장말씀과 제2독서, 오늘 읽은 에베소서 4장의 말씀, 그리고 제3독서인 복음서에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통해 “기독교 공동체로서 열린교회의 소망”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독서, 구약의 사무엘하 18장은 다윗의 셋째 아들인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 중에 가장 용모가 아름다운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부인도 많고 아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압살롬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다윗의 가장 아픈 손가락 중에 하나였고, 동생 다말이 배다른 형인 암논에 의해 겁탈을 당하자, 2년을 기다렸다가 암논을 죽이는 다윗 가문의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은 눈에 띄는 외모와 지략으로 유다 족속이 아닌 북쪽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지만, 에브라임 숲에서 대패를 당하면서 도망하던 중에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서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 오늘 함께 볼 1독서의 내용입니다. 용모가 아름다웠던 압살롬은 그의 자랑이었던 머리가 나무에 걸려서 죽임을 맞는 장면은 자신을 돋보이게 했던 것이 오히려 자신을 죽임으로 몰아가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우리들에게 선사합니다. 압살롬을 사랑했던 다윗은 압살롬을 죽이지 않기를 당부했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수인 요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도 아이러니 합니다. 그리고 요압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했을 때, 압살롬과 다윗을 화해하게 했던 장본인이라는 점에서도 아이러니합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자기가 원하는대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고, 서로와 서로를 화해시킨 긍휼함을 갖춘 충실한 부하도 역사적인 분기점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모험을 하는 과감함을 보임으로 영원한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이야기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렇게 피로 얼룩진 이야기는 다윗의 통곡으로 마무리됩니다. 성경은 압살롬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했던 것이 오히려 자신을 죽임으로 몰고갔던 장면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수리 나무에 머리카락이 꼬여서 나무에 매달리게 되어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압살롬의 모습은 다윗이 압살롬을 살려내라는 명령 앞에 있던 요압의 결정에 우리들의 생각이 머물게 합니다.


성경읽기, 제 2독서: 에베소서 4장

두번째 독서인 에베소서는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들이 한 몸 지체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한 몸 지체로서 하지 말아야할 것 과 해야할 것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화를 내지만, 죄를 짓는데 까지 하지 말라고 하고, 2)해가질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말라고 합니다. 3)악마에게 틈을 주지 말고, 4)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5)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6)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2-1)떳떳한 벌이를 통해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2-2)덕을 세우는 말을 적절한 때 함으로 듣는 사람이 은혜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2-3)서로 친절히 대하고, 2-4)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2-5)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하고, 2-6)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은 가볍게 읽으면 윤리적인 잣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읽어도 당연히 우리들의 삶에서 일상적인 바른 삶과 관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양이 “상식”적인 기준에서 이미 당연한 것들과 연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것은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 사랑,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들은 한 몸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하지 말아야할 행위와 해야할 행위를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사랑만큼 숱하게 들어왔지만, 삶으로 살아 내기가 힘들고, 그리스도인의 덕목에 대해서는 머리 속에 가득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드러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면 안됩니다.

최근에, 읽고 싶은 책을 하나 발견하고는 알라딘 US장바구니에 넣어 놨습니다. 제목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인데, 우리들은 지금까지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내는 것을 섭리라고 배워왔습니다. 적자생존이라는 이론은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하면서 진화론적 관점에서 대부분의 서양의 사고 구조를 지배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잠깐의 서문만 보면, 이 모든 이론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다정”한 존재가 지금까지 생존해왔다는 것인데,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다른 책들이 장바구니에 쌓이면 주문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향과 일치한다는 생각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대로라면,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들의 가장 큰 덕목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열린교회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 한 몸 공동체라는 것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게, 지금 우리들이 기대하는 삶의 방향, 교회의 방향입니다.

지난주에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한국치과 의사가 운영하는 치과에 방문했습니다. 제 진료카드를 보면서, “가까운데 사시네요? 학교에서 일하셔요?”라고 묻는데, 저의 대답은 아니요, 그냥 일해요로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는 나를 목사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나? 열린교회라는 교회에 목사입니다. 이 한마디를 왜 못했는지.. 하는 생각을 곰곰히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하실지 궁금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열린교회를 다니는 것을 드러내면서 사시나요? 아니면 되도록이면 교회 다니는 것을 숨기면서 사시나요? 제가 여러분의 답을 원해서 여쭙는게 아니라, 지금 우리들이 지금 잘 살고 있는지를 여쭤보는 것입니다.


성경읽기, 제3독서: 요한복음 6장

제3독서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의 유명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고백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7가지 자기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 고백을 통해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실제로 평생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묘하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들의 기대가 평행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와 사람들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빵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예수를 먹는 다는 말은, 우리가 이제는 전혀 다른 삶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가 기독교인을 정의하고 고백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예전과 같은 삶을 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고백에 사람들이 수근거립니다. 이유는 같은 동네에 사는 요한의 아들 예수 아닌가? 그런데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하는 선입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안에서 이와 비슷한 선입관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관만 있는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선입관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음으로 변화 받은 존재로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딪히는 현실에, 그리고 보여지는 공동체의 모습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또 하나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 있는데, 제목이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라는 책인데, 작년부터 코비드19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교회를 배경으로 삶을 살아내는 여러분야의 학자들의 대화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제목을 봐서도 아시겠지만, 교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성찰이 가득한 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성찰, 교회를 비판하는 일들은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신학교에 갔을 때 교수님들이 교회개혁을 성토하면서 예수 똑바로 믿으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교회가 변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제 교회에 어른이 없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어른들이 있고, 목사님들 중에서도 어른이 있었는데, 어른이 없고 다들, 미성숙한 아이들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볼 때, 스스로 어른이 되려고 하는 분들이 없기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책임을 지고, 자신을 희생하며 이야기하는 분들을 어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할 수 없다는 선입관, 내게 무슨 이런 능력이 있을까? 하는 의심들이 교회 안에 어른이 없게 하는 이유인 듯 합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제를 잘 아는데? 제가 무슨 그런 일을 하겠어?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들 귀에는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고는 주저합니다. 예수님도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에 가둬두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지 못하고 변화를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라고 다르겠습니까? 우리들도 부족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멀었다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인이라는 변화된 삶 마저도 주저하면, 우리들은 진정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여전히 교회가 변화되기를,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하는 마음만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바라기는 좀더 확고한 믿음의 경지를 세워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 자랑할만한 것이 어쩌면 우리를 가장 어렵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고, 자랑할 것, 자신만만한 것들을 내려놓고,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바랍니다.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것은 분별함으로 우리의 믿음의 소문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 저희들이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에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헌신해가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을 자신 있게 드러내고,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긴다면, 우리들의 변화는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든든히 일으키셔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랑함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열린교회를 세워가기를 원합니다.

9월둘째주에, 100%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델타변이로 주저할까 하다가도, 충분히 준비가 되고, 백신을 맞았고, 마스크를 쓴다면 우리들은 충분히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다 모여서 예배하는 기쁨 가운데 있기를 바라며, 단순히 모이는 것을 힘쓰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함께 희망을 세워가고 함께 우리들이 소망하는 공동체를 세워감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감을 든든히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조회 18회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