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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5일 주일 설교원고




야고보서 2:1~17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창조절 의미

오늘부터 대림절 전까지 창조절로 지키게 됩니다. 정식으로 교회력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해 지키기 위한 교회의 노력 중에 하나로 “창조절”은 전세계 교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 일어나는 산불과 허리케인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자연재해의 모양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환경오염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노력하는 것은 마땅히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환경보호에 대한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환경보다는 눈앞에 편리와 이익이 우선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 24편에서 시편 기자는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여기 두 개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피조물이 한 지구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고백이고, 둘째는 이 공동체가 모두 창조주에게 속해 있다는 고백입니다. 헬라어에서 이 지구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는 ‘오이코스(oikos)’라는 단어인데, ‘오이코우메네(oikoumen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오이코스’를 프란치스코는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우리 공동의 집’, 즉 ‘모두의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는 하나님의 것이며, 이 오이코스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피조물들이 구성원으로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기억한다면, 우리들이 왜 이 시간을 창조절로 지키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이 함께 모일 때, 작은 노력으로 환경을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하는지 충분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면 긴 시간일 텐데, 이 시간을 교회와 가정에서 최대한 노력하시고, 여러분들이 어느 것에 실패했고, 어는 것을 잘 했는지를 한번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움직이지만, 결국 큰 열매로 이끌어가실 줄 믿습니다.


야고보서 개론 : 실천적 믿음

오늘 읽은 본문은 야고보서입니다. 성경에는 두명의 야고보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쓴 것으로 초대교회 교회사가들은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부활하셨을 때 회심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본문의 내용은 매우 실천적입니다. 지혜서의 형식으로 보이지만, 야고보의 설교로 내용이 정리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바울은 이방인들을 전도하면서 믿음에 대한 체계를 세우고, 강조했다면, 야고보는 이례적으로 바울과 달리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다보니, 율법적인 실천보다 믿음을 강조함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무게를 두었다면, 야고보는 유대인들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다보니, 이전과 다른 삶의 모습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가 바울의 편지와 야고보서 두가지를 통해 균형을 잡으려고 한 이유는 믿음은 출신, 인종, 계급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하고, 야고보가 강조한 실천은 변화된 삶에 무게를 둠으로 두가지 행위가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자의 차별

오늘 본문 처음부터 야고보는 매우 직설적으로 내용을 전합니다. 1절에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차별하지 말라”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차별은 “편애”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차별과 편애라는 말이 비슷한 말이지만, 사용할 때는 온도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차별”이라는 용어가 지금의 “차별”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다시말해, 당연히 차별이 존재했던 시기이다 보니, 적당한 용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편애하다”라는 말로 사람을 대하는 차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야고보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가 “사람을 차별, 혹은 편애하는 것”에 익숙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절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 편애가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극단적으로 부자와 가난한자를 대조적으로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자, 그리고 금반지를 낀 자”와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자”라는 대립 구조를 두고, 교회가 화려한 옷을 입은 자에게는 호의를 베풀며, “여기에 좋은 자리에 앉으세요”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시오.”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예를 든 이야기이지만, 야고보는 당시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꿰뚫고 전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4절에 이런 행위를 하는 자를 향해 야고보는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비유로 야고보가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들을 교회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5절에서 야고보는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 시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5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가난한 자를 택하신 주님

야고보가 고백하는 복음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세상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의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한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복음의 의미보다, 사람들의 외형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복음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자 그리고 반지를 끼었다는 것은 단순히 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금반지를 끼었다는 것은 로마의 관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이 말은 교회는 부자와 권력 있는자를 환대하고, 그보다 못한 자를 차별하는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무슨 교회가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텐데, 한국에 서울에 가면 정동제일감리교회가 있습니다. 덕수궁 근처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예전에는 근처에 외국 공사관들이 몰려있어서 대부분 교인들이 귀족이나 양반층이 모였던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와 대각선을 가로 지르면 맞은편에 남대문 시장이 있습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데, 남대문 시장에 있던 상인들은 정동제일교회에 다니지 않고, 상동교회를 세웠습니다. 가까운 거리인데, 함께할 수 없으니 따로 교회를 세운 것이죠. 옛날에만 그런것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전도사생활을 할 때 주변에 영세민 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그러자 기존의 아파트 주민들이 초등학교 경계를 세워서 영세민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오지 않도록 교육청을 흔들어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되겠어 했는데, 실제로 학교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교회도 이런 영향을 받아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복판에 서있던 적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라는 고백과 함께 부딪힌 현실은 매우 복음적이지 않았고, 교회답지 않은 모습에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아마 한번쯤은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할 때는 교회는 당연히 이런 차별과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부딪히는 삶에서는 쉽게 생각하고 고백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이런 비슷한 행위에 있는 사람을 향해 야고보가 선언하는 말씀은 “서로를 차별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6절에는 야고보의 또 다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부자들을 대접하려고 하는데, 사실 부자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법정으로 끌고가는 자도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것도 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부자”와 “권력자”가 함께 사용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압제와 심판은 가난한 자들이 소유한 용어들이 아니죠, 실제로 부자와 권력자들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힘으로 사람들을 압제하고 심판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빈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여전히 사용되는 이유도 가난한자가 좀더 압제와 심판받을 가능성이 부자들보다는 크다는 관점은 변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방향,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8절에 보면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라는 말씀을 통해 야고보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다시한번 교회에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문장으로 9절에는 다시한번 야고보가 못을 박는 것이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선언함으로 “차별이라는 것”이 곧 복음을 훼손하고 “죄의 심판”을 받을 만한 사안임을 야고보는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무엇이 죄고,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냐라고 물으면, “차별하는 것이 곧 죄이고, 우리들의 사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율법의 불안정성 VS 자비의 완전성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하게 “죄”와 “사명”을 설명한 야고보는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이 간단하다는 것이 사실은 모두를 아우르는 것임을 설명합니다. 11절에 간음하지 말라는 것만 지킨다고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다른 계명도 함께 지켜야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은 큰 죄가 있고, 어떤 것은 조금 용서되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죄가 있는데, 야고보는 그런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간음한 죄가, 살인죄보다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차별한 것은 더 가볍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모두가 동등한 무게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해하면, 모든 율법을 잘 지켜내야 구원받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데, 12절을 통해 야고보는 “이보다 더 큰 자유의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통해 충분한 실천이 율법을 다 지키려고 하는 것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임을 설명해줍니다. 즉, 율법은 모두 동등하게 여기고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무게는 똑같고, 그 중에 어느 하나 가볍게 볼게 없는데, 사람들은 가볍게 보기도 하고,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주는 불안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의 율법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자유의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마음대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늘 생각하며 살아내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고, 이것을 한 단어로 야고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면 “차별”이라는 것은 당연히 일어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이 오늘 야고보가 전하는 가장 핵심적이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자비하지만,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 행동을 강조하다 보니까, 자칫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율법주의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오류가 교회안에서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 행위는 마치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부자들을 대접하는 행위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eleos”라는 말로 단순히 “동정심”이라는 뜻만 가진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친화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댓가나 결과를 기대하고 하는 행위 혹은 어떤 확실한 목적을 가진 행위가 아니라, 불확실하지만, 내가 마음 쓰는 만큼 결과가 없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쓰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실패했다고 구원이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이 판단하는 기준에 모자르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도 모자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했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랑을 기억하면 우리들이 붙들고 있는 기준이나 삶의 방향이 만약 차별이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모양으로 나타나면, 심판은 무자비하게 그런 삶에 내려 앉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믿음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6절에 배가 고픈 사람에게 가서 먹을 것을 좀 드세요라고 말만 하는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을 빌어서 이야기하면, “자비”가 결여된, 즉 행함이 따르지 않는 행위이고, 이런 행위를 죽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해 보입니다. 복잡하죠.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는 복잡할 수 있으나, 실제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것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삶, 행함이 있는 삶,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익숙한 말로, 약간의 긍정적인 오지랖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을 실천하는 행위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내 믿음 지키겠다고 내 신앙생활만 신경 쓰는 것은 그리스인의 삶이 아니고, 내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믿음을 실천한다는 것,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어떤 기대나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긍정적인 약간의 오지랖을 피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고, 자비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만, 차별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믿음을 지켜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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