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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2일 주일설교 원고




고린도전서 1:10~18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 저에게는 특별한 영적 여정이 있습니다. 한번은 이야기 드린 것 같은데, “독실한 기독교의 모양”을 드러내다 보니, 고등학교시절에 나름 “목사”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다.

2. 아마, 그때부터 거의 지금까지 저의 삶은 기독교를 탐구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나누면서 살아 온 것 같습니다.

3. 중간에 공부를 하기 위해 목회를 2개월 정도 쉰 적이 있긴 하지만, 저의 일생의 절반 이상은 교회에서 자라고, 교회 밥을 먹고, 교회안에서 사람 관계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4. 제법 긴 시간인데, 그 시간을 통과하며 지금까지 경험한 다양한 기독교인들의 모양이 있었습니다. 통성기도 혹은 방언을 해야 성령체험을 한 것이라고 가르쳤던 교회부터, 매우 이성적인 학자 스타일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다양했고, 각자 신앙의 모양도 다양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5.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은 늘 질문을 가져오게 한 것 같습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리고, 어느 것이 나와 맞고, 안 맞는 것에 대해서는 분별이 가능 해졌지만, 그렇다고, 나와 맞지 않은 것이 틀리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6. 이런 분별은 생겼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알면 알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7. 개인적으로 성령체험은 늘 매년 수시로 저에게 있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를 때와 달리 점점 더 깊이 알아갈 때 과연 내가 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이 목사로 부르셨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목사처럼 살수 있을까?

8. 다윗을 향해 “내마음에 합한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도 그런 목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과 어려움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9. 가끔 보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늘 명확하고 자신 있게 자신의 생각을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디서 저런 자신감과 확신이 올까? 하는 상대적인 비교를 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10.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이런 솔직한 마음을 나누는 이유는, 아마 제 말에 동의하는 분들도 있지만, “확신에 찬, 그리고 뭔 분명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저의 이와 같은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고 싶은 마음에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11. 어떤 사회학자가 이야기하기를 20세기에 대부분의 삶을 살아오시다가 21세기로 들어온 분들의 가장 큰 혼란은 “모든 것이 명확하던 시간”에서 “모든 것은 가능성 있는 시대”로 넘어온 것에 대한 혼란을 지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2. 답이 늘 있어야 하고, 답은 정해져 있으며, 답이 없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시대에 살던 분들이, 답이 없는 문제 앞에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 한 세대들과 마주하고 있고, 정해진 답보다는 다른 방향에서 다른 답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다양성의 시대를 지내야 하는 시대를 또한 마주하고 있고, 답이 없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갑자기 세상과 동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 우리들이 고백하는 기독교신앙은 이런 점에서 매우 명확하지만, 다양한 이해관계속에서 교회가 자리하고 있으니, 이런 현상은 우리를 꽤 도전적인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 우선, 처음에 말씀드린, “제가 점점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는 고백을 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15. 우리가 사는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돌보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16. 다른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쉽고, 가족들 중에 나 아닌 사람을 외면하는 것 또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17. 그런데,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들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그 사랑을 나타내며 위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저의 질문과 주저함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18. 우리들은 과연 누군가를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19. 저는 이 사랑을 알고, 고백하고, 전하고 있으면서, 정말로 이 사랑을 내 삶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저로서는, 더군다나 목사로 살아가는 저에게는 여전히 큰 도전이고, 저에게는 명확하게 응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아직은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20. 버티컬 리밋이라는 영화에서 가족들이 암벽등반을 하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아버지가 딸과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로프를 끊어내는 장면이 영화의 첫 장면인데, 저는 아직도 과연 내가 아버지가 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를 늘 스스로에게 질문한 것 같습니다.

21. 정말, 가족들을 위해 내가 저런 희생을 할 수 있을까?

22. 지금 아버지가 된 저는 정말 그런 희생을 할 수 있을까?

23. 제가 이런 고민을 하니까, 어떤 분이 이런 조언을 하셨습니다. 가장 큰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

24. 뻔한 이야기이긴 한데, 고민이 고민이다 보니, 저에게 가장 큰 사랑의 경험이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25.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생업전선에 뛰어드셨습니다. 매일 집에 함께 계시다가, 일을 다니시니까, 늘 밤 늦게 오시게 되었습니다.

26. 그때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가 그러는데 동생은 한 1학년정도 되었던것 같습니다. 저는 밤늦으면 졸리니까, 방에 들어가서 자는데 동생은 매일 엄마가 올때까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27. 어리니까, 속으로는 짠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동생을 보면서,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면~!”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28. 그러다, 어느정도 나이가 들어서, 전철에 거의 막차를 타고 오시는 어머니를 멀리서 뵌적이 있는데, 추운날인데 머리를 꽁꽁 싸매고 전철에서 조시는 모습에, 그때 동생이 그리워 하던 엄마에 대한 마음이 제 마음에 확 들어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9. 딱히, 아들들이 뭐 살갑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냥 느낌으로 그 때 그 분위기만 기억하는데, 아. 이런 사랑보다 가늠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나 하는 생각에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30. 그런데, 그 사랑을 내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이웃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성도들을 그렇게 사랑해야”한다고 하니, 이게 엄두가 날 만한 일이겠습니까?


31. 이게, 내가 하려니까, 어렵게 느껴지는 거에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가 가진 지식으로, 머리 써가면서 하려니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32. 그런데, 저만 이렇게 “내 능력”으로 허둥지둥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러는 것 같아요. “내가 하려고 하니까” 근심이 생기고, 내가 가진 생각과 머리로 하려고 하니까, “자기 의”라는 것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33. 내가 사랑하려는 것도,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철저하게 내가 하려는 의지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해야 하는데, 대부분 내가 가진 지혜와 능력으로, 힘으로 하려고 하니 저와 같은 이런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34.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이 본격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35.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로 하면 가장 분주하고, 번잡하면서, 여러 인종이, 여러 종교가, 섞여 있는 당시로서는 가장 음란하다고 평가받는 곳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36. 이런 곳까지 복음을 들고 교회를 세운 바울의 사명은 대단합니다. 아마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곳을 거들떠 봐서도 안되는 곳이고, 과연 하나님의 구원이 있을까? 싶은 곳인데, 그곳에 교회를 세웠으니, 바울이 생각한 복음의 영역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었던 것 같습니다.

37.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그들이 보인 견고한 복음의 능력을 칭찬합니다. 그들이 지닌 장점, 다양한 문화와 지식을 이용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견고하게 했으니 그렇게 평가할 만합니다.

38. 그런데, 그런 칭찬과 반대로 오늘 본문은 바울의 걱정과 우려가 담겨져 있습니다.

39. 10절에 보면, 바울이 “모두가 같은 말을 하며, 분열이 없도록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가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0. 다른 말들이 존재하고, 다른 마음, 다른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41. 바울은 이 소식을 정확하게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글로에의 집사람”이라는 의미는 글로에의 가족과 종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인 글로에는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가 부리던 종들까지 함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42. 간단한 한문장이지만, 여기에 글로에가 어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지가 잘 담겨져 있습니다. 우선, 글로에는 종을 부리는 주인이라는 일반적인 기준과 다른 그리스도인이라는 기준을 우선 순위에 두고 종들과 관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3. 세상이 다 그렇게 하는 일에, 글로에는 잠시 멈추고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자신의 종들도 구원하실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고백을 하며 자신의 종들과 함께 글로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이 주신 일을 함께 감당하며 노력했을 것입니다.

44. 이런 글로에와 그의 집사들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파벌이 생겨서 문제가 생겼다고 전한 것입니다.

45. 교회안에 아볼로 편이 있고, 게바 편이 있고 바울 편이 있다는 것입니다.

46. 바울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마 경악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7.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들이 모인, 복음의 공동체인데, 사람들이 그 안에서 “나는 아볼로 선생편”이야, “우리는 게바가 더 좋아”, “나는 바울편”이야 라는 구별이 생겨난 것입니다.

48. 왜 이런 구별이 생겨나과 파벌이 생겨났냐면, 계산하고 머리로 판단하고,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이끄심보다 앞서가니까, 자기에게 달콤한 것만 주는 것을 쫓다보니까. 이런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49. 바울을 보니까, 고생만 하거든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지만, 바울이 고생한 모습에 바울처럼 사는 건 매력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아볼라가 더 맘에 든다. 게바가 더 맘에 든다.

50. 아볼로는 바울보다 말을 잘하고, 세련되게 복음을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무 지적이에요. 이성적으로 복음을 가르치니까, 매력이 떨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기도도 크게 소리내서 해야 하고, 방언도 해야 하는데, 아볼로는 너무 조용하고 잔잔하니까, 바울이 더 좋고, 게바가 더 좋다고 여기는 겁니다.

51. 게바, 곧 베드로는 교회의 머리라고 소문이 났어요. 뭐 당시 교회가 지금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게바가 지도자라고 하니까, 게바가 더 크게 매력적인거에요. 그래서 게바파라고 스스로 이야기합니다.

52. 이게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머리로 계산하는 거에요. 그리고 판단하는 거에요. 그렇다 보니 파벌이 생기고, 구별 짓고,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것에 힘을 빼게 되는 겁니다.


53. 바울은 고민없이 이런 구별을 없애고, 교회가 일치할 것을 권면합니다.

54. 13절에, 바울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55. 이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56.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보다, 자신에게 세례를 주거나 선생으로 가르쳐 주거나, 요즘 이야기로 하면,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자기가 그렇다고 믿는 신념을 우선하고 사람을 구별합니다.

57. 바울은 단호하게 “이런 구별을 짓고, 파당을 짓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58. 그리고 마지막에 1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59. 바울의 이 고백을 깊이 묵상하면, “십자가를 하나님이 능력”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60. 십자가를 능력으로 믿고 사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목적을 두고 사는게 아니라, “십자가를 능력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정확하게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61. 그러면, 절대로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선생을 따르는 존재, 즉 서로를 구별하고, 파당을 짓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는 일치와 화합 그리고 동일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62. 십자가의 능력은 “세상을 이기는 가장 큰 힘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혹시 분열될지 모르고, 세상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는 구별에 대해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은 스스로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에 우리의 모든 감각과 고백을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63. 이런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면서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내가 어떻게 무언가를 해야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내 힘으로 혹은 내 의지로 결단해야 뭔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니까, 우리는 여전히 자연스럽게 사람을 구별하고, 누가 누구편이라는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때로는 열심을 내다가도 크게 낙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64. 저는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65. 내 능력으로, 아닌 내 지혜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힘입어 하나님의 사랑을 내 삶에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내 생각으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저에게 맡기신 이유는 “내가 지금 너와 함께 한다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고백합니다.

6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십자가의 능력으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고 일치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67. 이 그룹, 저 그룹, 이 교회 저 교회로 사람들은 나누지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이 땅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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