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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5일 주일 설교, 성령강림후 9주





요한복음 6:1-15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

열릴 수 있을까 싶었던 도쿄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과 같지 않은 분위기,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아직까지 우리를 걱정스럽게 하는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올림픽이 열리다 보니 98%이상 모든 경기가 무관중으로 치뤄지는 특별한 올림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전세계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위해 한곳에 모이다 보니 어떤 변수가 특히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스러운 것이 대부분의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이슈가 많은데,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이야기는 이번에 참가하는 선수 중에 “난민”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국가의 개념이 아닌, 난민으로 올림픽에 참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올림픽을 통해 우리들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의미 있게 여기는 것을 크게 담아내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라기는 큰 문제없이 원래의 올림픽 정신을 되새겨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지난주에 처음으로 민간인들이 우주여행을 하는 큰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제프 베이조스”라는 아마존 창업자가 “블루 오리진”이라는 우주탐사기업을 세워서 “뉴 쉐퍼드”라는 이름을 가진 우주선을 타고 자신의 동생과 82세의 월리펑크, 그리고 18세의 청년인 올리버 데이먼이 10분간 100km 높이 우주에서 무중력을 경험하고 내려왔습니다. 조종이 필요없는 원격조정으로 이루어진 이번 여행의 탑승자중에 올리버 데이먼은 비드를 통해 탑승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얼마에 경매로 비행티켓을 가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처음에 1등으로 비드에 성공한 사람이 2,800만 달러, 약 322억5000만원에 낙찰을 받고는 포기하는 바람에 두번째로 올린 올리버 데이먼의 아버지가 낙찰되었다고 하니까, 대충 엄청난 금액으로 우주여행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우주여행을 바라보는 저의 개인적인 마음에는 경이로움과 불편함이 함께 공유되어졌습니다. 불편함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부자들의 재미있는 놀이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고, 경이로움은 세상이 펜데믹으로 추춤하고, 환경파괴로 인해 큰 홍수로 위기감이 있어도 인간은 언제나 진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의 끄트머리에 저에게 주어진 생각은 “우리 인류는 정말로 진보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점점 진보하고 있고, 좋아지고 있는건지… 혹시, 이런 진보를 위해 우리들이 놓치고 살아가고,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인지,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옛날이 좋았어..”라는 말을 되풀이 하시는데, 저도 점점 이런 비슷한 생각이 드는 것을 봐서는 분주하게 시간을 빨리 지나가지만, 정말 좋은 것들은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뭐 이런 생각들이 이번 한주간 제 마음을 속에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우리들이 그래도 오늘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는, 여러분들의 신앙은? 점점 좋아지고 있는지? 혹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방향을 잃고 흐트러진 것은 아닌지? 하는 질문도 한번 스스로에게 던져 봤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 교회의 질문: 우리들의 질문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우리들은 간단히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 기적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모든 복음서에 등장하는 유일한 예수님의 기적 사건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겹치기도 하고, 어느 복음서에서만 등장하거나 빠지기도 하는데, 오병이어 기적은 모든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복음서의 기록과 달리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 모든 행위를 이끌어 가시고 있는 것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남은 것을 버리지 말고 다 모으라고 말씀하심”으로 어느 정도의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가늠하도록 이야기 자체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표징 때문이라고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표징은 병을 고치는 행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사람을 돌봐준 마음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 기댈 수도 없는 연약하고 아프고 현실이 막막한 자들에게 기적을 베푸셨다는 의미입니다.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4절에 보니까, 시간으로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는 것을 봐서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이유는 자신들의 연약함과 막막한 현실에 예수님이 보여줄 표징을 기대하며 모였을 것입니다.

5절에, 예수님이 눈을 들어서, 큰 무리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서”라는 말은 단순히 무리들을 눈으로 보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ἐπαίρω epairo,라는 “스스로를 고양시키다”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니, 예수님이 스스로 진지하게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마음을 먹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작정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디에서 이들을 모두 먹일 빵을 살수 있을까?”라고 물으십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이 “시험을 하기 위해 물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시험이 필요했을까? 갈릴리 호수 맞으 편, 즉 디베라 호수 건너편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닌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다고 기록한 것을 봐서는 더 한적한 곳으로 옮기셨고, 거기까지 무리들이 몰려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많지 않은 곳, 한적한 곳에서” 어디를 가면,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빵을 구할 수 있을까? 하고 빌립에게 예수님이 물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의 응답: 우리들의 응답

빌립의 대답이 빠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였는데, 빌립은 이 사람들이 다 먹일 만큼의 빵을 사려면 “얼마”가 드는지를 계산해 냈습니다. 이백데나리온을 가지고도 모자랄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에 한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시간당 품삯을 $15로 계산해서 하루 9시간 정도 일한다고 생각하면 하루 품삯이 대략 $135정도 되니까 이백 데나리온이면 $27,000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액수도 놀랍지만, 남자만 오천명 모인 그 자리에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엄청난 무리들이 예수님 주의에 몰려들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8절에,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에 “안드레”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9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디서” 빵을 구할까라고 물으셨는데, 빌립은 “얼마”가 든다고 응답하고 있고, “안드레”는 당장의 여기서는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으로 응답합니다.

제자들의 응답은 합리적입니다. 빌립은 정확했고, 안드레는 엉뚱했지만,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은 이 엉뚱한 안드레가 가져 온 정보를 가지고 좀더 엉뚱한 일을 하십니다. 11절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안드레가 이야기한 빵을 예수님이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들어올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눠주고는 남은 것을 버리지 말고 다 모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장정만 5,000명 여기에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10,000명이상의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앞서 본문에서 언급한 디베랴는 2만5천명이 거주하는 도시였고, 갈릴리지방 수도였던 셉포리스는 1,700명이 거주했으니까,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고, 이들을 다 먹이시고 12광주리나 남기셨다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합리적이 주는 함정

제자들처럼 이 본문을 읽어내는 우리들은 더 강력한 합리적인 판단으로 이 기적을 이해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고민 끝에 한 소년이 무리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은 것을 보고는 마음에 찔림이 생겨서 모여있던 무리들이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눈 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교회는 오랫동안 지속해왔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을 예수님을 주어로 하는 문장을 연속해서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3절에 예수께서 산에 오르셨고, 5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보셨고, 6절에, 예수께서 빌립을 시험하셨고, 10절에 예수께서 사람들을 앉게 하셨고, 11절에 예수께서 빵을 들으셔서 감사를 드리셨고, 12절에, 남은 것을 버리지 말고 모두 모으라고 하셨고, 15절에 혼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 이와같은 문장 구조로 정확하게 예수님이 어떤 행위로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시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하셔서 다시 홀로 산에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은,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번째 산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디베랴 호수 반대편으로 가신 것입니다. 두번째 산에 올라가신 이유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는 행위 그리고 사람들을 먹이신 행위를 출애굽 때 모세의 사건과 비교해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오름으로 하나님과 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에서 광야 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바로 모세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풍족하게 먹이신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와 비교하여 오병이어 사건이 바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시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이 오병이어 사건을 사람들은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해로 제2의 모세로 예수님을 이해했을지 모릅니다. 빌립을 시험하시는 것은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똑같이 우리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까?” 빌립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안드레처럼 엉뚱하지만, 혹시 부족하지만, 이런 것도 있다는 응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을 들어 무리를 보시고, 앉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바라보시고,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목격하기 위해 자리에 앉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물으시는 예수님

우리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이런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향과 다른 방향에 서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할까 질문하셨을 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들고 나올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예수를 고백할 때 예수님은 다시 홀로 산에 올라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리를 보시고, 이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알 수 없는 시간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는 개인적으로 가장 두렵고 떨리는 순간을 맞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하기 버거운 어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럴 때, 무리를 보시고 제자들을 시험하시며 질문했던 것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합리적은 방법을 찾아서 그것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엉뚱하고 가능성이 없는 안드레와 같은 마음으로 혹시 이것으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에 응답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응답이 옳고 그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무리를 바라보듯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를 여기에 앉게 하셨다는 확신이 있다면, 가장 희박한 가능성으로 우리를 가장 큰 열매로 이끌어가실 줄 믿습니다. 이것을 저는 믿음의 여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정확한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이 채워지지 않음에도 그 자리를 채우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9월이 되면 전면 대면예배를 준비중입니다. 아직까지도 부족하고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100%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15개월 이상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하면서 다양한 마음들이 존재 했었습니다. 어떤 분은 다시 교회를 시작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하는 분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속히 예배를 드려야 교회가 안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나누는 분도 있었고, 어떤 분들은 이 와중에 목회자가 바뀐 것이 불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복잡함 가운데,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를 이 자리에 앉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은혜와 사랑 가운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우리들이 앞으로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에 두가지 마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불안함과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 우리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믿는자의 모습은 이 불안함에, 또한 새로움에 마음을 고정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우리들이 사람이라는 존재로 거기에 그리스도이라는 존재로 주님이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이 자리에 앉으시셔서, 그 불안함과 새로운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 열린교회를 통해 이루어가실 일들을 소망하며 예수믿는 삶의 기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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