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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2일 부활절 5주 설교원고


Rembrandt,_The_Baptism_of_the_Eunuch,_1626,_Museum_Catharijneconvent,_Utrecht

사도행전 8:26-40

기쁨에 차서 가는 길


초대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나름 시스템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따로 일곱 집사를 세워서 구제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곱집사중에 스데반은 순교자로, 그 순교를 일으킨 장본인이 사울, 즉 바울이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사울이 주도한 박해에 제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특히 헬라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박해의 가장 큰 피해자였습니다. 일곱집사중에 빌립은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으로 이 박해를 피해 도망하면서 여러가지 사역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일곱집사중에 초대교회에 상당한 사역의 열매를 맺은 사역자로 우리들은 빌립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오늘 읽은 본문 이전에, 빌립은 박해를 피해서 사마리아땅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에, 빌립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세례를 받는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 이전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마술사 시몬이 등장하고, 그가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것도 우리들이 잘아는 장면입니다.

이런 빌립을 하나님이 이번에는 광야로 내 몰았습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광야에, 마침 유월절을 지키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보면, 이 에티오피아 내시는 빌립의 전도로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길을 “기쁨의 차서”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빌립의 사역을 이야기했지만, 빌립이라는 한 사람의 사역을 통해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사역” 즉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치는가? 라는 질문에 빌립은 그의 복음 사역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 혐오범죄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는 인종차별이라는 오래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인종차별의 원인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인종, 민족, 성별, 문화적 차이들은 가끔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로 제시됩니다. 이런 이슈들을 깊이 생각해보면, 익숙하지 않은 것, 혹은 많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 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학교 다닐 때 저는 개인적으로 첫 수업 시간이 가장 두렵고 긴장되었습니다. 낯선 클래스룸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에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첫 수업 첫 시간을 보낸다는 게 여간 긴장되는게 아닙니다. 이런 어색함, 익숙하지 않음은 우리를 “구별짓기”라는 구조주의적 편견을 익숙하게 만들어냅니다. 이런 편견에 익숙해지면, 오늘은 아시안이 차별을 받고있지만, 다른 날에는 다른 인종이, 다른 민족이, 다른 성별이,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이 혐오의 대상이나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피에르 부루디에라는 프랑스 사회학자가 “구별 짓기”라는 책을 통해 좀더 이런 편견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계층 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것들이 존재하고 이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혐오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혐오나 차별”은 결국 내가 익숙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놀라실 수 있는데, 불편함, 익숙하지 않음이 어떻게 혐오의 감정, 차별에 근거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모든 사람이 불편함을, 익숙하지 않음을 통해 혐오와 차별이 일어난다면 심각한 문제겠죠. 그런데, 그만큼 혐오와 차별이 그렇게 심각한 것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한다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들이 차별과 혐오에 대처하는 태도는 가장 가볍고, 진지하지 않은 감정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차별과 혐오에는 어떤 철학이나, 심각한 고민, 혹은 정당성들을 절대로 찾을 수 없고, 성숙하지 못한 응답으로 심각한 행위로 표출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고 인정하면 우리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고난을 극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빌립의 이야기로 들어가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이나,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그리스도 복음을 전한 것은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그 안에 초대교회의 사역 방향을 확장하는 보편적 복음에 대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에게 애증의 민족입니다. 앗수르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앗수르가 진행한 식민지 정책으로 이방 민족과 피가 섞인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 자체는 “제국의 압제에 철저하게 파괴된 역사적 상처”의 상징이고, “함께할 수 없는 이웃”으로 꽤 오랫동안 이스라엘 공동체의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는 “내시”라는 특별한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시는 거세된 남성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23:1보면, “거세된 남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이사야 56장 4절에서 5절에, 이사야는 마지막 때에 이런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예언을 하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내시”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자”로 인식되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에 이어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은 “사회적, 종교적 통념으로 높게 세워진 벽”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복음의 진수를 빌립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빌립의 이야기 이전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도, 오늘 읽은 본문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도행전이 어느 방향에서 사도들의 사역을 주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하려고 노력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 박해로, 박해를 피해 도망치고 있던 빌립에게 특별한 사역이 허락되었습니다. 교회는 박해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들은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곳에 전해지게 하셨습니다. 박해를 하는 자들은 더 이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사람들이 가로막은 감정과 문화, 율법의 벽들을 넘어서서 복음이 역사하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광야로 나아가는 길로 안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이 “주의 천사”가 “성령”이라는 표현으로 바꿔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이 또 한가지 확인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은 곧 우리들이 가는 길을 안내하는 분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길 위에 있고,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은 곧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주어지는 길 위에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게 하는 질문에 우리들의 삶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7절에, 성령의 안내에 따라 광야로 나아간 길에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와 수단을 포함하는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고, 간다게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간다게 왕조를 가르키는 명칭입니다. 이 간다게 왕조에서 재정을 담당했다는 의미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도,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고, 유대인처럼 완전한 권리를 갖지는 못했지만, 유대교의 진리가 옳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다시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는 중에 빌립을 만난 것입니다.

28절에 이 내시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글을 읽는다는 것은 소리를 내서 읽는 다는 의미이고, 에티오피아 사람이 히브리어를 읽지 못했으니까, 칠십인역이라고 하는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희귀하고 값이 비싼 두루마리 성경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에티오피아 내시가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신앙도 상당히 깊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말씀을 읽지만,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에티오피아 내시의 부탁에 빌립이 그 뜻을 풀어서 설명하게 됩니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해 못한 성경 본문은 “이사야 53:7-8”로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 이 본문에서 예언자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이 내시는 궁금했던 것입니다.

빌립은 이 말씀을 풀어서 예언자가 말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가는 길에 “물”을 있는 곳에 다다르자, 에티오피아 내시가, 주저없이 빌립에게 세례를 받기를 청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39절에,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자 마자 주님이 영이 이끄시는 대로 길을 떠났고, 에티오피아 내시는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라고 증거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에티오피아 내시 한사람의 회심이 오늘 이야기의 주제라기 보다는 더 큰 의미가 담겨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이 내시를 통해 에티오피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굉장히 큰 의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티오피아가 오래된 기독교국가인 이유는 바로 빌립이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에티오피아 내시가 믿고 전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박해로 도망가던 빌립이 가던곳 마다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했더니, 또한 사람들의 편견이나 높은 벽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더니, 한 알의 밀알처럼 한 나라를 기독교국가로 세워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이것을 가꾸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짧은 비유 속에, “내게 붙어있으면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하나님이 잘라 버리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손질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들이 확인하는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살아가고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 열매도 맺지 못하고, 붙어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잘려 나가느냐?의 선택에 우리들의 삶이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이라는 것인 단순히 무조건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위해 우리들은 열매 맺기 위해 늘 예수님의 가지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교회와 성도가 어떤 방향으로 신앙생활하는 존재임을 명심하게 합니다.

우선, 가지에서 잘려나가는 존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가지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라는 것은 우리들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지, 가지가 가지끼리 좋은 가지 나쁜 가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있기 위해 노력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가지인 우리들이 열매를 맺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는 것일까?


요한1서 4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익숙할텐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서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서로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합니다. 무슨 이런 말이 있겠나 하시겠지만, 오늘 말씀으로만 보면, 예수님 포도나무에 우리들은 가지이고, 가지로서 할 일은 “열매”맺고, “서로가 사랑하는 것”이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간단하죠. 근데, 이 간단한 일을 삶으로 직접 해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삶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차별되지 않고 모두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입니다.


종교의 속성 중에 믿음이 크고 작고를 이야기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믿음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상한 습성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고 작고 부터 시작해서 헌금을 많이 내고 적게 내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고 적게 하고, 늘 헌신하고 덜 헌신하고…이런 구분들이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중요하지 않음에도 우리들은 이와 같은 기준으로 사람의 믿음도 차별하고 이 차별은 때로는 미움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오늘 빌립이 보여준 복음을 전한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이 세워놓은 이런 구분과 상관없이 전해야 하고, 전해지고 있으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삶의 길을 나아갈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오직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늘 예수님 곁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는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뿐 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기쁨에 차서 함께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멋진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합니다. 그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는, 그러므로 열매와 사랑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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