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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6주, 5월9일 주일 설교원고


베르나르토 카발리노, 베드로와 고넬료, 1640년

사도행전 10:44-48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주에 이어서, 제자들의 확장된 사역을 경험하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들에게 익숙하지만, 교회와 예배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시에 매우 생소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과 같았을 것입니다. 어떤 모델이나, 경험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제자들이 믿는 것이라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부활의 증거, 성령 체험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예수를 전하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것과 부딪히고, 그 새로움을 어떻게 해석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이 제자들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런 제자들의 노력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빌립이 박해를 피해 시작된 사역이 사마리아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열매로 이어진 것을 살펴봤다면, 오늘은 베드로가 경험한 특별한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제자들을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 어떻게 그들의 삶을 익숙하게 만들어 가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말씀 이전에 본문에 보면, 베드로에게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집에 가기 전에 머문 곳은 무두장이 시몬의 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두장이는 가죽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죽을 다루기 위해서는 죽은 짐승을 다루어야 하는데, 죽은 짐승을 다루는 것을 유대인의 율법으로 보면 부정한 일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일을 악취를 풍길 수 밖에 없는 일이었기때문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 아닌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에 시몬이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집에 베드로가 머물렀다는 것은 무두장이 시몬이 초대교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자였다는 의미이고, 이런 이유로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으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는 일을 우선순위가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무두장이 집에 머물면서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정오에 무엇을 좀 먹었으면 하는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중에 황홀경에 빠지는 장면이 10장10절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황홀경에 빠졌다는 의미는 ἔκστασις ekstasis, 라는 헬라어를 사용했는데, 우리말로 표현하면 흔히 입신했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취한 상태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황홀경에 있던 베드로가 환상을 보는데, 하늘이 열려서 큰 보자기 네 귀퉁이에 끈이 매달려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온갖 네발 달린 짐승과 땅에 기어 다니는 온갖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모든 것을 다 잡아 먹으라”는 음성을 듣게 되는데,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지금까지 속되고 부정된 것은 한번도 먹은 적이 없다고 하면서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라는 두번째 음성을 듣게 되는데 이렇게 세번 반복되는 일을 경험하고는 이 환상이 무슨 의미일까? 베드로가 곰곰이 생각할 때,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무두장이 시몬 집에 도착한 것을 성령의 음성을 통해 알게 됩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무두장이 집에서, 베드로가, 환상으로 율법으로 금지된 음식을 하나님이 먹어도 된다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로마백부장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모셔가기 위해 무두장이 시몬 집에 도착합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지금까지 유대인으로서 지켜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험들이 이어집니다. 두번째로는 베드로가 유대인들의 율법과 유대인들에게만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도록,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베드로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초대교회는 새롭게 경험하게 될 새로운 환경과 분위기 그리고 이방인들을 대하는 특별한 이해를 갖게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이렇게 만나게 된 고넬료의 집에 가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일어난 마지막 장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라는 인물은 로마군대의 백부장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성경은 담백하게 고넬료라는 사람을 등장시키지만, 당시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에서 바라보는 고넬료의 위치는 상당히 높은 권력자로서 일반 유대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고넬료의 집안은 주전 82년경에 노예 일 만명을 거느렸던 로마에서 명망 있던 집안이었는데, 이 만명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는 고넬료 집안의 성을 주었기때문에, 당시 로마출신의 고넬료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명망 있는 그리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또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고넬료라는 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이 누리는 삶의 방향은 늘 다른 사람들을 돕고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하지 않는 일들을 개혁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집안으로 소개합니다. 이런 집안에 로마 백부장으로 일하는 고넬료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넬료가 기도하는 중에 근처에 베드로가 머물고 있다는 환상을 보고는 자신의 종들을 보내서 베드로를 자기의 집으로 모셔온 것입니다.

베드로의 복음 사역은 고넬료의 집에서도 성공적이었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자기가 경험한 것을 간증합니다. 고넬료의 집에 오기 전에 경험한 일들은 자신을 좀더 편안하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넓혀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고넬료와 그리고 그곳에 모인 고넬료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베드로의 말에 좀더 집중하게 이끌었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중에, 오늘 읽은 44절, 말씀에 보면, 베드로의 복음의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렸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성령 받는 것은 이제 초대교회 안에서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45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할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 믿게 된 사람들, 즉 유대 기독교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동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신 사실에 놀랐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이방 사람들에게도”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와 달리 함께 온 유대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들에게 일어난 것에 놀랐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상치 못한 일들이 초대교회 사역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것에는 이해가 빨랐지만 그렇지 못한 것에는 대부분은 주저하게 됩니다.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선물로 주어져서 놀랐다는 표현은 그들의 사고와 판단속에서는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베드로와 동행하면서 고넬료와 친구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런 선입관들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이성의 주장>이라는 책을 쓰셨는데, 이 책에서 이분이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여성과 어린이 혹은 흑인이나 범죄자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들이 정의에 가까이 이를 수 있기 때문이고, 정의가 실현된다는 의미는 어떤 행위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인식의 변화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 실현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카벨은 우리들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길에서 만나는 홈리스들에 대해서 늘 길에서 만나는 존재로 인식할 뿐 그들의 아픔이나 어려움을 가볍게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면을 카벨은 “눈먼 영혼의 상태”(soul blindness) 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외면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마도 노예제도가 존재할 때, 노예들을 소유물로 보았지 한 영혼으로 보지 않았던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흑인이나 동양인들이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 논의했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에 지배받음으로 온전히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초대교회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46절에 고넬료 집에 모인 모든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이방인조차도 품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차별없이 진행되어질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이 안에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들은 늘 익숙한 것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 오는 것이 익숙하고, 11시에 예배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점심을 함께 먹는 애찬이 익숙하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열린교회는 이곳에 있는 것이 익숙하고, 청년들이 많은 것이 익숙합니다. 속회 모이는 것이 익숙하고, 기쁨의 언덕으로 말씀을 나누고 소그룹 모임을 갖는 것도 익숙합니다. 이런 익숙함들 속에는 불편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년 이상, 코로나바이러스라로 인해서 펜데믹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교회에서 예배하는 익숙한 것에서 단절되었고, 11시에 교회에 오는 것이 단절되었습니다.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 함께 예배 후 식사하는 익숙함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년이 다 되가는데 담임목사도 바뀌어서 익숙하지 않고, 교회가 늘 이 자리에 있지만, 우리들이 물리적인 행위는 단절되었기에 익숙하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강제적인 단절 속에 생각이 깊어지면서 드는 마음은 지금까지 익숙한 것들이 전혀 익숙하지도 않고 때로는 모험적이라고 생각해서 주저했던 방향으로 우리들의 삶이 몰아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황홀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정도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열린교회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저나 여러분이나 삶에 가장 익숙한 것에 녹아있던 마음과 정신을 이제는 새롭고 늘 주저하던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가끔은 전혀 생소한 것에 주저주저 한 것들도 용기를 내서 한발짝 내딛는 시간을 맞이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과 다른 현실과 전망이 우리들 삶에 놓여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어떤 사명과 부르심 앞에 있는지 확인하시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와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려고 하는 노력으로 우리의 사역과 사명도 확장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확장과 도전이 지금 우리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셨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련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치열한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복음은 살아서 우리에게도 역사한 것을 잊지 마시고, 우리도 이런 치열한 삶으로 몰아 쳐가서 하나님의 뜻을 품어내도록 노력하기를 원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을 향해간다는 것은 새로운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본문이 요한1서 5장과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랑”은 어쩌면 우리들이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쉽다고 생각했다면 더 어려운 자리에 사랑이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지금까지 머리 속에만 있던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들의 삶에서 세워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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