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능력으로 다시한번
사도행전 2장1절-13절
교회의 시작: 성령강림절
성령강림절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 즉 성령 체험을 통해 제자들은 각성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기때문에 성령강림이 곧 교회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체험 후 변화된 제자들의 기세에 유대인들이 놀라서, 머뭇하게 되고, 사울을 앞장세워서, 박해를 시도해보지만, 오히려 복음을 널리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울은 바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를 받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성령 체험” 즉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체험 사건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생일, 교회의 시작은 성령 체험을 통해 가능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오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기독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큰 오해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기독교를 주로 서양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습관입니다. 19세기 서양으로부터 우리에게 기독교가 전해져서 생긴 오해일 수도 있는데, 유럽과 미국이 아닌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된 시기는 카톨릭의15세기나 개신교회가 전해진18세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서양이라고 이야기하는 북서유럽은 4-5세기에 기독교를 접했습니다. 기독교의 시작 즉 교회의 시작은 팔레스타인이었고, 여기서 시작된 교회는 소아시아, 시리아, 그리스, 로마,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중동, 에티오피아, 인도, 중국등으로 차례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즉 교회는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서양 종교로 인식된 계기는 대항해 시대 이후, 스페인, 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등 서유럽 국가와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서양의 제국주의적 세계 진출을 통해 기독교가, 교회가 서양의 중심인 것처럼 자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우선적 이해: 변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기독교의 중심이 서양이 아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그들이 생각한 땅끝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데, 서양중심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다 보니까, 성령 받은 제자들이 서양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사역했는지에 대한 교회의 역사가 가볍게 다뤄지고 있다는 생각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도를 주목해야합니다. 우리가 아는 인도는 흰두교를 중심으로 다신교의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의 기독교역사는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두제자중에 한사람인 사도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다는 구전은 오랫동안 알려져 왔습니다. 이 전설같은 이야기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복음이 전해진 증거보다 더 탄탄한 증거들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암브로시우스 등 초기 교부들의 일관된 주장에서도 이 증거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16세기에 유럽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이 인도 남서부 말리바르 해안에 도착했을 때, 서양교회와는 다른 현지 기독교인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들은 도마에게 복음을 전수 받은 이들이라 자처했고, 도마와 관련한 민요, 교회, 기적 문헌등도 상당히 존재했다고 합니다. 사도 도마의 이름이 유래한 “마르토마”기독교인은 인도 남서부 중심으로 오늘날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가 인도의 남서부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도로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성령 체험”을 통해 변화된 도마였기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성령의 능력”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뛰어 넘는 능력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람을 통해 기대이상의 열매를 경험하게 하는 열매가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령에 대한 오해
신앙생활에서 성령에 대해서 강조는 많이 하지만, 실제로 성령의 이해가 부족한 경우를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성령에 대한 오해는 첫 번째로, 성령의 역사가 기적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을 통해 기적을 경험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곧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성령의 역사는 신비롭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비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이야기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성령의 역사는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 좋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성령의 역사는 꼭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은 가장 큰 성령에 대한 오해입니다. 꼭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적은 특별한 어떤 일인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받은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구별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성령의 역사 가운데 나아가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고, 바울처럼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두번째, 성령의 역사가 신비롭다라는 말은 꼭, 비현실적인 현상만이 성령의 역사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평범한 삶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뭔가 특별하고 신비로운 사건이 일어나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하는 가장 흔하게 성령을 오해하는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역사는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성령은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종종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하는 생각인데, 분명한 것은 성령의 역사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고, 이미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성령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지금 성령님이 나와 함께하시는지, 성령의 역사가 내 삶에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성령받은 제자들: 한곳에 모임으로
오늘 읽은 본문으로 들어가보면, 성령받은 제자들 우리들이 기대하고, 혹은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1절에 보니까 오순절이 되었을 때 라는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이 지난날, 보리 수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리떡을 드리는 날을 가르킵니다. 성경은 이 날,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개인적으로 저는 “한곳에 모였다”라는 이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제자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움”이었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이것만으로 십자가의 고통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제자들 사이에 가시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이정도 되면, 공동체는 무너지고, 희망없이 제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순리입니다. 제자들도 이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흩어졌을 것입니다. 부서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이들이 “한 곳에 모였다고 합니다.” 이 “한곳에 모였다.”라는 문장 속에 처음에 나눈 세가지 성령에 대한 오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성령의 역사는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 성령의 역사라고 기억하는, 교회를 일으킨 성령의 역사, 제자들을 변화시킨 성령의 역사는 여전히 그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불편함, 혹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한자리에 모여들었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람에게 성령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곳에 모였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성령의 모양: 평범하지 않지만, 특별하지도 않은
2절에 보니까, 세찬 바람이 불 듯이 소리가 나더니 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같이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았다고 합니다. 연합감리교회 마크를 보면 십자가 옆에 빨간 문양이 바로 이것을 상징화 한 것인데,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한 사람이 불을 받아서 뜨거움을 느낌으로 성령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어떤 신비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 모양과 바람소리가 그 자리에 임했다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모습이었다고 성경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통성 기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입신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람소리에 불길같은 것이 머리 위에 올라섰던 모양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적이거나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모양이 아닙니다.
방언의 이해: 마침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
4절에 보니까, 딱하나, 성령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특별하게 보입니다. 흔히 이 말씀 때문에 성령충만함이 곧 방언이라고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언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방언의 역할은 성령받은 사람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자들을 주목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본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온 세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때에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오십일이 지난 후 한자리에 모여있던 제자들은 성령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몰려든 사람들이 오순절까지 남아있다가 예수의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6절에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제자들이 말한 방언은 외국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닌 외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충만함을 통해 받은 방언의 의미는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주목하고 제자들 주변으로 몰려들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방언이 결코 성령충만함의 결과가 아니라,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마련된 도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성령받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어떤 행위가 바로 방언과 같은 행위입니다.
7절 8절 모두, 외국말로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보면서 놀라는 장면들입니다. “보니까 다 갈릴리 사람들인데, 그리고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데, 어떻게 우리 동네 말을 말하고 있지? ”라는 질문과 함께, 바로 이 제자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충만함의 결과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주목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침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침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쓰임 받는 자들이 바로 성령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변화는 늘 이해할 수 없다는 질문을 일으킨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본 유대인들이, “술에 취했다”고 오해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술에 취했다는 것은 지금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고, 들어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을 애써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유대인들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받음으로 변화된 삶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첫 목회를 시작한 후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이 저에게 하는 말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목회자가 될 것 같지 않았는데, 목회자가 된다고 하니까 애써서 어떻게 이해해보려는 친구들의 노력을 보면서 내가 예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마음으로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나서서, 아직 오전9시인데 술에 취할리 없다고 하면서 담대하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령의 역사의 클라이 막스는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을 많이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성령받고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로운 사람으로 모여든 유대인 앞에서 서게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예수님의 진짜 제자로 사람들 앞에 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가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통해 이해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충만함은 우리들이 한곳에 모여있을 때 경험하는 것입니다. 결코 혼자서 교회 밖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성령충만함을 통해 우리들이 받는 놀라운 변화는 “마침 필요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해하는 성령 충만은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조차도 마침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성령체험 이후에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들 몸에 부어진다는 의미는 곧 우리들도 변화를 받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역사라는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교회의 변화, 교회의 회복은 여전히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하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교회를 예전처럼 희망과 생명의 자리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일인 오늘, 여전히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믿는 우리들이 단단히 마음을 다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희망이 되기 위해, 성령의 역사를 우리의 삶을 드러내며 살기위해 결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함께 모이기 위해 힘쓰고, 마침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에 맞는 도구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여전히 교회의 뿌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생명을 일으키기 위해 헌신하고, 베드로처럼 그리고 도마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한다면 교회는 예전처럼 빛나고 희망의 자리, 생명의 자리가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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